對談
석가모니 . 예수 . 소크라테스 . 노자
어떤 기준에서 이 네 사람을 성인이라고 말하는가?
바로 진리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본문 중에서-
일 시 : 1998년 8월 2일
장 소 : 국제정신문화연구원
대담자 : 원장 이 삼 한
정 리 : 편집부
중생(衆生)의 세계와 성인(聖人)의 세계
눈뜬장님
이번 호에는 중생의 세계와 상인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는 대담자리를 마련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많은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이후, 남긴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지고 있다.
"중생은 눈뜬 장님과 같다"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사람들은 진리 속에 있는 일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 속에 있는 가르침을 잊고 산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는 석가모니가 한 말을 통해서 성인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 속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본지 9월 호에 실린 일본인의 기고문, <도쿄대학론(東京大學論)> 은 큰 관심을 끄는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런 것이었다.
"도쿄대학의 법학부를 나온 사람들은 일본의 엘리트로서 사법부나 행정부에 많이 들어가 있다. 사법부나 행정부의 관리는 모두 시험을 통해서 선발된다. 도쿄대학의 머리 좋은 학생들은 관료가 되기 위해 날마다 법전이나 참고서적을 달달 외우는 방식의 공부에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머리 속에는 법학이나 행정이론만 가득했지, 한 사람의 인격완성을 위한 교양교육은 전무한 상태다. 그 결과 고급관료가 되고 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나면 일종의 권위의식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일본의 장래에 매우 우려되는 현상이다"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에 능통한 것은 아니다. 기계를 다루는 사람은 기계 일을 잘 하고,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법 이론을 외우게 되며 또 농사를 오래 지은 사람은 농사일에 대해 잘 안다.
그런데 이론만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나타내는 모습이 바로 권위의식이다. 인간사회에는 이 권위의식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권위의식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4대 성인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은 품위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에게 세상의 역사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 역사 중에서 특히 진리를 보는 사람들, 진리를 세상에 펴고자 했던 깨달은 사람들의 역사인 4대 성인의 기록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했다.
석가모니·예수·소크라테스·노자를 두고 왜 인간의 역사는 그들을 성인이라고 말했는가?
왜 세상사람들은 이 네 사람을 성인(聖人)이라는 칭호로서 받들어 왔는가?
오랜 역사가 지나는 동안에도 그들은 왜 세상사람들의 뇌리에 항상 살아있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이 4대 성인이 인간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이며,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성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또 과연 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면서, 지금의 인간사회의 모습을 조명해 보자.
석가모니
석가모니의 생애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히말라야 설산(雪山) 아래 펼쳐져 있는 인도(印度)의 무더위는 52도까지 올라가는 살인적인 혹서(酷暑)이다. 석가모니가 악조건 속에서 고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는 그의 부친인 정반왕(淨飯王)이 병사들을 시켜 식량을 보내고 의복도 보내면서 항상 아들의 안부를 알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자 부모와 가족, 그리고 제 나라 백성들의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 아무도 석가모니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굶어죽는지 맞아 죽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모두들 석가모니와 멀어지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석가모니는 일생동안 어떤 사람에게도 환영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끝없이 인도대륙을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인도의 대륙은 한반도보다 엄청나게 넓다. 주(州) 하나가 한반도만 하다. 그 넓은 인도대륙을 걸어서 헤매고 다닌 것이다. 이는 자신이 보게 된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어서 사람들의 삶이 보다 밝고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보람을 찾아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사회가 아닌 그 당시에 석가모니가 82세의 생애를 산 것은 대단한 장수(長壽)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나이가 되어서까지 여행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그토록 인간 사회에 삶의 큰 축복을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했던 노력만큼 사람들로부터 생전에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배척받은 부처
어떤 곳에서는 한 여자가 뱃속에 바가지를 넣고 와서 "이것은 네 아이다."하고 그를 매도했다. 또 어떤 곳을 지날 때는 "네가 진짜 깨달은 자이냐."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나중엔 따르는 자들이 여러 명 생기게 되었는데 그들이 스승이라고 받들자, 어떤 자들은 혹시 부처가 집에 들어오면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봐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어떤 장자(長者)는 석가모니에게 "우리 집에 오셔서 우기(雨期) 동안은 편히 지내십시오."하고 초빙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 부자 집에 들어가 우기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처음에 그 장자는 부처라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가르침이 매우 고귀하여 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모셔보니, 식사 때가 되어 밥을 주면 다같이 예사롭게 먹고 가만히 앉아 지내다가 변소에 내왕하는 것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부처의 모습이나 말을 통해 큰 것을 얻을 줄 알았는데 석가모니의 말과 모습에는 아무런 위대함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 장자는 실망한 나머지 점점 부처를 미워하더니 밥조차 주지 않게 되었다.
비는 쏟아지는데 유행(遊行)을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는데 밥을 주지 않으니 배가 고파서 크게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예가 있지만 석가모니가 인간 사회로부터 당한 냉대나 음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진리 속에 있는 일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려 하자 세상사람들은 그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크게 환영하지 않았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가 보여준 성인의 삶의 모습이었다.
처형당한 예수
이런 점에서는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석가모니 부처처럼 해탈을 한 분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의 내면에는 진리의 눈이 있어서 남을 깨우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른 살에 대중 앞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부르짖은 것은 우상타파였다. 거짓을 섬기지 말고 있는 일을 섬기자는 말을 외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사회처럼 그 당시의 사람들도 사랑에 대해 이해하기를 인정이나 동정, 애정 등이라고 알았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용어란 어떤 대상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대상에 그 관련용어가 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용어 속에 있는 진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진리의 측면이나 그 속에 있는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일반사람들은 참된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선자를 더 가까이 하게 되는데 위선자들은 항상 인정과 동정과 애정을 말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반사람들은 동정이나 인정이나 애정을 쉽게 좋아한다.
일반사람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전할 수 없었고 사랑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위선자 또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위선자가 사랑을 안다면 그는 위선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을 알았는데 어떻게 위선자가 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오늘날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종교에게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물어 보면 사랑을 제대로 알고 말할 수 있는 종교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는 황야에서 사람을 만나면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바로 정의를 밝히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세상의 일을 밝히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는 예수가 12제자와 함께 옷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크고 훌륭한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지만 그 당시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는가는 확인할 수도 없고 또한 믿기 어렵다.
다만 일반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음해와 무고에 의해 죄 없이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조국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점령국인 로마의 총독은 예수에게 아무런 죄가 없고 로마의 이익에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를 살려주려고 했다.
어느 날 예루살렘의 큰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라바'라는, 절도·강도·살인·강간 등 여러 가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서 유태인의 율법으로도 사형에 처해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예수는 어떠한 살인도, 강도도, 절도도, 강간도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총독은 이 두 사람을 앞에 두고 군중들에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가 은총을 받을 것인지, 누가 큰 죄인으로서 형장에 끌려갈 것인지를 여러분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살려 줄 것이냐?"
그러자 군중들은 "바라바! 바라바!"하고 외쳤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증거는 예수가 처형을 당했다고 기록된 역사에서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수!" 하는 사람의 소리는 너무 적었고, "바라바!" 하는 사람의 함성은 떠나갈 듯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처형당했다. 그래서 이때의 재판은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고 악독한 죄인을 구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군중은 절대로 예수를 악의 제물로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크게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조용하게 독약을 마시거나 전기의자에 앉아서 쉽게 죽은 것도 아니었다. 처형을 받으러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두 명의 도둑은 십자가만 지었고, 예수에게는 네가 무슨 왕이냐 해서 가시넝쿨로 만든 테를 머리에 씌워 예수의 얼굴과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그 어떤 경우보다도 혹독한 모함으로 처절한 고문을 받으면서 죽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예수는 실제 생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고난
소크라테스도 청년들을 일깨우기 위해 있는 일을 밝히려 했다. 사회를 위해, 인간사회의 행복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일깨우려 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세상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소크라테스를 모함하여 재판정에 서게 했다.
그리스에는 그 당시 배심원 제도가 있었다. 재판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크라테스의 범죄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판결을 요청했다.
배심원들은 첫 판결에서, 55%는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고 45%는 무죄라고 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죄상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히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일일이 설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에 대해 상세한 해명을 했고, 그의 해명이 끝나자 다시 배심원들의 두 번째 판결이 나왔다. 이번에는 배심원의 절대다수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크라테스의 해명을 들은 배심원들의 마음이 첫 번째 판결 때와는 달라졌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좀더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몇 모이면, 하나의 일을 두고 의견통일이 되지 않으니까 서로 시비를 하며 언쟁을 일으키는 일들이 자주 생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그의 친구들이 도망을 가라고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어디에 간들 내가 대접받을 곳이 있겠느냐?"
소크라테스는 세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을 대접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곳이 없다고 하며 친구들의 망명권유를 뿌리쳤다.
그는 감옥 안에서 독약을 마시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聖人 [老子]
노자는 제자를 남기지 못했고 또한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노자는 당연히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나 노자가 성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노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다. 그는 여러 나라들이 다툼을 하던 시대에 태어났고 그런 와중에서 세상 속에 있는 진리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세상의 일을 알게 되자 미친 사람처럼 이곳 저곳을 헤매며 끝없이 방황을 했던 것이다.
전해지는 노자의 이야기 중에, "어느 곳의 국경을 넘는데 국경을 지키던 한 병사가 '당신이 노자냐?'고 관심을 표시하기에, 노자는 자신이 알게 된 진리와 세상에 대해 말해 주게 되었고, 그 병사는 자신이 들은 것을 기록했었는데 그 기록이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
노자는 결국 그의 일생을 통하여 죽을 때까지 떠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세상에 밝히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그를 외면했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말을 건넬 상대조차 구하기 어려웠고 한 사람의 제자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노자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네 사람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성인이라고 말하는가?
거기에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 있다. 바로 진리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완성의 길을 세상에 밝히려고 했다.
진리의 가르침도 최고의 가르침이지만, 인간완성의 길도 진리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최고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최고의 가르침을 인간 세상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네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성인의 참모습
그런데 이 네 사람의 성인은 아무도 화려한 의상을 갖추어 입거나 위엄을 부리며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래를 겉모습이나 목소리를 통해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여래는 온화한 모습이나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습이나 말·소리로써 성인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 진정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부처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의 말이 오랜 세월 속의 경험철학에서 나온 것이고 있는 일을 보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가장 오랫동안 사람 속에서 활동했고 가장 많은 가르침들을 세상에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그를 제대로 받아들였건 받아들이지 않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그는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서 인간세계에 있던 일들을 가장 많이 지적하고 많은 교훈이 되는 말들을 남겼다.
인류 역사 속에는 학식과 위엄을 갖추어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제자들이 존경을 표시했던 학자나 종교인들이 많이 살다 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도 성인의 반열에 들어선 사람이 없다.
살아서는 실제로 성인이나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아무도 성인의 반열에 들어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진리의 가르침을 가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일은 항상 유념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서 직위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어떤 위엄을 갖추었다 해서 그가 많이 알고 있고 뛰어난 자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좋은 말을 한다 해서 그것이 큰 가르침은 아니다.
어두운 사회일수록 위엄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위엄을 갖추고 모르는 소리· 거짓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좋아하고 그곳에 가서 그 말을 따르려고 한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거짓말이다. 왜 사람들은 위엄을 갖추려고 하는가? 위엄을 내세우는 것은 바로 위선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이 자기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바로 그 위엄이 넘치는 모습을 통해서 자기의 무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무지한 사람들은 절대로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위선자들의 사고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정의는 세상을 밝히는 길이다. 정의가 무엇인가? 있는 일을 밝히는 것이다.
있는 일을 밝히면 거기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진실이 드러나면 세상의 옳고 그름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게 되어 있다.
사람의 의식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그대로 노출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선자와 참된 자가 확실히 가려지게 되어 있다.
결국 세상의 일을 밝히는 것은 위선자에게는 자기를 죽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선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참된 자를 외면하고, 방해하고, 해치고, 음해 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간의 역사에서 항상 확인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일들에 대해서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거짓말이란,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말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