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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인생

열외(列外) 사병

 

 

李 三 漢

 

누군가가 군대생활은 요령이라고 했다.

이 말의 속내는 요령을 잘 부리면 군대생활을 그만큼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그 요령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일면을 보였다.

부대 내에서 고된 일을 한다고 하면 나는 언제나 환자로 빠졌고, 식사시간이 되면 가장 활발한 병사의 모습을 보였다. 지휘계통의 직속상관이나 선임자가 기합을 주려고 하면 나는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어떤 기합도 받지 않았다.

그러자 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소문이 소속연대 내의 타 부대에도 퍼져 나갔다. 그래서인지 그 무렵부터는 직속 중대장도 일등병인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다른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은 나를 항상 열외 사병처럼 취급을 했고 누구라도 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나에게서 골탕을 먹었다.

다른 사병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정말 꿈같은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점호시간이 되면 중대의 주번하사는 주번사령 앞에 서서 이렇게 보고를 했다. "총원 몇 명, 현재원 몇 명, 사고 몇 명, 사고내용...... 열외 1(환자 1), 이상 무."

그런데 '열외 1명'은 나를 말하는 때가 많았고 또 '환자 1명'은 내가 몸이 불편해서 빠지게 된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러다 보니 군대는 나에게 꿈같은 시간들을 갖게 해주는 곳이 되었고, 그 군대생활 시절은 나의 생에서 가장 편안한 한 때였다.

항상 나의 옆에는 외로움을 덜어줄 동료 병사들이 있었고, 숟가락만 챙겨 가지고 다니면 항상 제때에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또 의복이나 잠자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은 주어진 시간을 즐기는 일뿐이었다.

보직상 나에게 주어진 직책은 대대탄약고 소속의 탄약반원이었다. 그러나 탄약고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직속 중대장은 나에게 하나의 직책을 맡기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부대 내의 누구라도 나의 요령 앞에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부대 내에서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에게 문제를 일으키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굶주렸던 뱃가죽에 살이 붙으면서 나의 호연지기는 끝없이 피어났다.

나는 점점 명물로 변해갔다. 동료 병사들이 나를 볼 때는 그야말로 머리 좋고, 당당하고, 배짱 좋은 사병이었다.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던 나는 탄약반에 소속된 다른 대원을 통해서 중대장이 나를 중대 행정반으로 호출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나는 영문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부르는 일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즉시 행정반으로 들어갔다.

중대장은 나에게 배짱이 좋다느니, 똑똑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면서 한참동안 부추겨 세운 후에야 나를 부르게 된 용건을 말했다.

중대 창고의 지붕을 덮는데 사용할 풀을 베러 가는 데에 인솔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로 상등병 계급장을 주면서 일등병 3명과 상등병 한 명을 데리고 가게 했다.

중대장으로서는 병사들 중에서 나를 통솔할 자가 없으니까 내가 통솔자가 되면 다른 병사들이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풀을 베러 부대를 떠나고 보니 그렇지를 못했다.

우리가 풀을 베러 간 곳은 연천에 있던 군자산이었는데, 때는 8월 중순이라 한여름이었다. 우리는 군자산의 중턱에 있는 어느 마을 옆에 개인용 천막을 설치하고 그 주위에 있는 풀들을 베기로 했다. 그 마을에는 여러 가구의 농가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여자까지 고용하고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술집도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함께 갔던 병사들이 내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면서부터 우리들 속에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나에게 있었다.

우리가 천막을 친 곳에서 멀지 않은 밭에서 어떤 아가씨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병사들에게 풀을 베라고 지시해 놓고는 아가씨들이 있는 밭으로 갔다. 의외로 아가씨들의 얼굴이 예뻤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아가씨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만 열중했다.

밭에서 김을 매던 아가씨는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서울의 청량리에서 미장원을 한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서울의 모 여고 2학년 학생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자매 사이로,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에 잠시 다니러 왔다고 했다.

내가 두 아가씨에게 정신이 빠져 있는 동안, 열심히 풀을 베어야 할 다른 병사들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서 풀 베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고 밤이 되자 그들은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여자가 있던 술집을 기웃거렸다.

이러는 동안 금새 며칠이 지나가고 제대로 풀을 베어 놓은 것도 없으니 나와 함께 갔던 병사들은 두려움이 생기는지 아무도 부식을 수령하러 부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대로 부식을 수령하러 갔다가 중대장이라도 만나게 되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풀을 베러 온 4명의 병사들은 서로 입을 맞춘 듯이 내가 들어서 싫지 않을 소리만 했다. 풀은 자기들끼리 열심히 벨 테니 나는 하루 한 번이면 되는, 다섯 사람이 먹을 부식 타오는 일만 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그 제의는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아가씨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부식을 넉넉하게 수령해 와서 그 일부를 여자들 집에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더 지나자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해야 했다. 부대로 부식을 수령하러 갔던 나는, 중대장과 바로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중대장은 나에게 내일 풀을 실으러 갈 것인데 그 동안 베어 놓은 풀이 트럭으로 몇 대 정도의 분량이 되는지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싣기 나름 아닙니까? 많이 실으면 한 차 정도될 것이고, 적당히 실으면 예닐곱 차는 될 겁니다."

중대장은 내 말을 듣고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여섯 대나 일곱 대 분이라."

우리가 크게 농땡이를 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중대장은 연대 수송부에서 트럭을 가지고 군자산에 우리가 베어놓은 풀을 실으러 왔다.

나는 병사들을 집합시키고 중대장에게 "필승!"하고 경례를 했다.

중대장은 여느 때와 다른 나의 행동에 의아해 하면서 우리들에게 베어 놓은 풀을 트럭에 싣게 했다. 우리들이 한 대 분이 채 안 되는 풀을 트럭에 다 싣고 나자 중대장이 "나머지 풀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작업을 했다면 예닐곱 대 분의 풀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대답을 해야 했다.

"어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실으면 한 차 분밖에 안 된다고 말입니다."

내 말을 들은 중대장은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화도 내지 못했다. 조용히 우리에게 천막을 걷으라고 하더니 부대로 복귀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우리들이 베지 못했던 양을 보충하기 위해 중대원 전원이 나서서 열심히 풀을 베어야 했다.

나는 탄약고 내에 있는 막사에서 며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또 중대장이 나를 호출했다. 중대본부로 찾아간 나에게 중대장은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쁘지 않은 말을 하면서 우리 중대의 취사병 중 한 사람이 휴가를 가게 되었으니 당분간 취사반에 가서 일을 거들어 주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는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지만, 겉으로는 내가 그런 일을 해보지 않아서 서툴겠지만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중대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사실상 나 같은 병사를 취사반에 보낸 것은 중대장의 중대한 실수였다.

취사반에 가보니 두 명의 취사병들은 모두 나보다 선임자였다. 그리고 중대의 1종계 계원 역시 나보다 계급이 높았다. 그렇지만 내가 취사반으로 오자마자 그때부터 취사병들과 1종계 사병은 골치를 앓아야 했다.

나는 먼저 1종계에게 '드디어 내가 장병들을 위해 정량급식의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매 끼니마다 1종 창고에서 쌀과 보리를 수령하면서 사병 1인당 기준정량에 인원을 곱한 쌀과 보리의 양을 수치로 제시하고 1종계가 불출해주는 분량을 저울에 달았다. 그리고 1종계가 보는 앞에서 종이에 꼬박꼬박 메모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난처해했다.

그렇게 한 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아서 드디어 1종계와 취사병들이 나에게 항복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의논을 하자고 했다. 주식을 맡겠느냐, 부식을 만드는 일을 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화부일을 하겠느냐는 결정을 내가 우선적으로 하라고 했다.

나는 백 수십 명 분이나 되는 쌀과 보리를 씻고 밥을 짓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은 양의 부식을 만드는 일도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끼니 때마다 아궁이 뒤에서 탄을 개고, 불쏘시개로 탄불을 지피고, 불을 올려서 밥과 국이 다 되면 탄불을 덮는 화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내가 해야 하는 화부일은 하지 않고 일부러 딴전을 피웠다. 취사병에게 탄을 개고 불을 지피는 시범을 보여라 하고는 나는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만 있었고, 밥이 다 되어서 탄불을 덮어야 할 시간이 되어서는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밥솥에서는 밥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고, 국솥에서는 국이 끓어 넘쳤다. 이러다 보니 내가 해야 하는 화부일을 결국 두 취사병이 도맡아 했다.

나는 취사병들이 밥을 다 해놓고 나면 제일 먼저 부뚜막에 앉아서 밥과 국 속의 맛있는 건더기를 잔뜩 건져 놓고 혼자서 양껏 먹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 내의 취사장에는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필요한 물은 취사병들이 우물에서 길어서 사용을 했는데 취사장에서 가까운 우물은 계곡 바로 밑에 있었고, 다른 우물은 더 먼 곳에 있었다. 그리고 우물에는 물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때가 되자 한 취사병이 나에게 물을 길러 가자고 했다. 나는 어떤 일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 특기였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하면 그때마다 나는 다시는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못하게끔 상대에게 골탕을 먹였다.

나는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계곡의 우물까지는 50m쯤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계곡을 오르내리는 길은 매우 가팔랐다. 취사장에서 물을 길어 나르던 용기는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큰 통으로서 양쪽에 굵은 철사를 묶어 두 사람이 목도를 해서 운반을 했다.

나와 취사병은 우물물을 길어 그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워서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했다. 나와 함께 갔던 취사병은 나에게 물통의 앞쪽에서 목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목도를 하고 앞에서 용을 쓰며 비탈길을 올라갔다.

그러다가 비탈길의 중간쯤에 이르자 힘들게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쭉 폈다. 그러자 목도의 앞 뒤 각도에 따라 통에 담겨 있던 물이 순식간에 뒤쪽 아래로 쏟아져서 뒤따라오던 취사병이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취사병은 울상이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겸연쩍은 목소리로 "나는 이런 일을 안 해봐서 잘 못한다고 했는데..." 라고 말하면서 실수를 오히려 순박한 취사병에게 떠넘겼다.

이런 일이 있고 나자 취사병들은 나에게 겁을 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나더러 어떤 일도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취사병들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나를 함부로 대했다가 골탕만 먹게 되자 한 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취사반으로 간지 3일째 되던 날, 그들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밥은 마음대로 먹어도 좋으니 자기들이 안 보이는 곳에 가서 놀다가 밥 먹을 시간에만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왜 내가 그래야 되느냐고 하면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그러자 두 취사병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말을 들으면 쉽게 동의할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했다가 내가 그것을 거절하자 빌면서 통사정을 했다. 나는 속으로는 취사병들이 나에게 항복한 일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못 이겨서 승낙을 하는 척했다.

두 취사병은 나에게서 날마다 골탕을 먹는 것보다 세 사람 몫의 일을 두 사람이 하고 내 얼굴을 잠시라도 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계산에서 그들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인 것에 대해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 후에도 그들은 내가 언제 또 기분이 틀어져서 자기들에게 골탕을 먹일지 항상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취사병들은 나의 어떤 요구도 잘 들어주었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군대에서는 1주일마다 한 끼씩 쇠고기국을 급식했다. 내가 두 취사병과 약속하기는 취사반일에 관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날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부식이 도착하자 취사병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그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쇠고기의 수령이 끝나자마자 취사병에게 말했다.

"내가 요즘 들어서 몸에 힘이 빠지고 있는데 보신을 좀 해야 되겠으니 쇠고기 몇 근을 내 몫으로 달라."

그러자 취사병은 누군가 밤중에 조사라도 나올지 모르니 다음날 아침에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아침의 쇠고기 급식을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나는 삶은 쇠고기를 도마 위에 놓고 잘게 썰기 시작했다. 내가 썬 쇠고기 조각은 다른 중대의 취사장에서 써는 크기에 비하면 4분의 1크기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 정도를 남겨서 평소에 나에게 아부를 하던 병사들이나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부산 출신의 다른 중대의 사병들에게 특별히 나누어주었다. 그 날 아침 중대원들은 쇠고기 배식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지만 누구도 그 일로 나에게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다.

배식이 끝나자 나는 곧 부대를 빠져 나왔다. 내 손에는 방금 전에 배식을 끝내고 남은, 신문지로 싼 쇠고기 뭉치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나의 발길은 군자산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지난번에 중대의 창고지붕을 덮기 위한 풀을 베러 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알게 된 아가씨 집을 찾아간 것이다.

"누님 계십니까?"

울타리도 없는 작은 토담집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나는 군화를 벗고,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누님 이것 좀 드시라" 고하면서 쇠고기 뭉치를 방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아가씨들의 아버지가 "아니, 뭘 이런 것을 다 가지고 왔느냐" 고하면서도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가씨들의 아버지가 "밥은?" 하고 묻는 말에 "먹고 왔습니다" 했다.

그러자 그는 딸들에게 농주 한 사발을 가지고 오게 하더니 술이나 한 잔 하라고 나에게 권했다. 농주를 마시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2시였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대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내가 중대 내무반에 들어갔을 때는 3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내무반에 있던 중대 내의 선임자들이 나를 보자 히죽히죽 웃어대었다. 그러다가 그 선임자들 중에 보급계 계원이 나에게 말을 했다.

"너, 쇠고기 싸들고 군자산 밑에 여자들 집에 갔다 왔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야, 이것들이 모두 알고 있었구나' 하면서도 겉으로는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또다른 선임자가 "너를 중대장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이 좀 지나쳤나'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이것들의 기를 살려 놓으면 앞으로 내가 행동하는데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말을 듣자 버럭 화를 내는 척하면서 사물함 위에 있던 대검을 뽑아 마룻바닥에 꽂았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함부로 날 음해하는 놈들은 배를 갈라놓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중대의 보급계가 "중대장이 너를 찾는 것은 무슨 볼일이 있는 모양이더라" 하면서 어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중대장에게 가보기로 했다.

"필승! 이 일병, 중대장님이 불러서 왔습니다."

중대장은 나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입가에 미소부터 지었다. 나는 중대장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지 영문을 모른 채 주위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때 중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에게 1종계 창고에 가서 2일 분의 식량을 수령해 오라고 했다.

내가 다시 오자 대대 연병장에 있던 트럭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타라고 했다. 트럭에는 대대의 4개 중대의 사병들이 각 중대마다 1명씩 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트럭을 타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트럭에는 여러 개의 더플백(duffel bag-군용 자루)들이 실려 있었고, 더플백 속에는 수리를 하기 위한 헌 보급품들이 들어 있었다. 트럭은 내가 타자 곧 출발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곡에 있는 병참지원 부대였다.

트럭이 부대로 들어가자 병참지원 부대의 군인이 나와서 트럭 위에 실렸던 더플백들을 내려놓을 장소를 지정해주었고 우리는 중대별로 가지고 온 더플백을 그 장소에 정렬시킨 다음 그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트럭 운전병은 부대로 돌아갔고 얼마 후 병참지원 부대의 군인 몇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더플백 속의 물건과 수량을 일일이 체크를 하고 나서 우리에게 인수증을 써주면서 2일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우리는 병참지원 부대를 나와서 함께 의논을 했다. 지금 부대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인근에서 머물다가 일이 다 끝나면 귀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5명이었다. 의견은 인근에서 머물다가 일이 끝나면 귀대하는 쪽으로 통일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근에 있는 마을에서 일행이 머물 곳을 찾아보기로 했고, 잠시 후 우리는 한탄강 가까이에 있던 어느 민가에서 빈방 하나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집 솥을 빌려, 각자가 휴대하고 온 식량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당연히 나는 그곳에서도 열외가 되었다. 아무도 내가 식사준비나 기타 잡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병사들은 계급을 떠나서 나를 리더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화기중대 소속의 상등병이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근무하던 부대에서는 보급품 수리를 하러 나갔던 병사가 3개월 정도 있다가 귀대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다른 병사들은 모두들 나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이런 일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만한 배포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상등병의 말은 이곳에서 3개월 정도 농땡이를 치다가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의중을 물은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각자의 의사를 확인한 다음 이렇게 저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날 우리는 소속 부대로 일단 돌아갔다.

나는 부대에 도착하자 중대 행정반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중대장이나 인사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장교식당 앞에서 중대 인사계와 탄약소대 선임하사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사계와 선임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필승!"하고 경례를 했다. 두 사람은 나에게 "잘 다녀왔어?" 하고 물었다.

나는 "그게 아닙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인사계가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니?" "애로 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

인사계와 선임하사는 영문도 모른 채 애로 사항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있지도 않은 일을 꿰어 맞추며 내가 하고자 했던 말들을 정리해서 설명을 했다.

"병참부대에서는 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도 구보를 시키고, 점호에 참석하라고 하는가 하면 새카만 놈들이 말을 놓고 대드니 죽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좀 빼고 다른 병사를 내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통사정을 하는 척했다.

그러자 인사계와 선임하사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네가 우리 부대에서는 제일 힘도 세고 똑똑한데 너를 빼고 흐리멍덩한 다른 놈을 보내면 보급품을 다 잃어버리게 되니 고생이 좀 되더라도 참고 있다가 일이 끝나면 돌아오라"고 하며 나를 구슬렸다.

나는 속으로 신이 났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내 수에 안 넘어가면 어쩌려고' 하면서도 겉으로는 "인사계 님과 선임하사 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어쩔 수가 없지요" 하면서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대답을 했다.

그리고 만약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나는 꼭 빼줄 것이라는 확답까지 받고 나서 나는 중대 서무계를 찾아갔다. 서무계에게서 15일짜리 파견증을 만들고 그 파견증으로 1종계에게서 식품류를 수령했다.

다른 4명의 병사도 나와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다시 모이게 되었다.

민가에서의 생활은 낭만이 있었다. 낮에 더우면 강에서 멱을 감았고 배불리 먹고 실컷 잠을 잤다. 우리에게는 누구의 간섭도 없었고 밤이나 낮이나 자유시간뿐이었다. 계급으로나 나이로 따지면 모두들 나보다 앞선 병사들이었지만 오히려 일등병이요 18세 나이의 어린 내 말에 다른 병사들은 잘 따랐고 나의 지휘를 받고 싶어했다.

하루는 한 병사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집에 좀 다녀오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병사는 나의 능력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또 나의 능력이라면 그런 일은 가능하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돈이 좀 들어도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병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면서 더욱 매달렸다. 그 병사의 집은 전라도 쪽에 있었고 우리가 있던 전곡에서는 제법 먼 거리였다.

나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전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부대로 찾아갔다. 그리고 도장이 찍힌 휴가증 용지 한 장을 구해와서 그 병사를 일주일 동안 고향에 다녀오게 했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도 고향 집에 다녀오기를 원했고 일이 이렇게 되자 모두들 내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내가 술이 먹고 싶을 때는 누군가가 술을 사 왔고, 또 무엇이 먹고 싶으면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음식을 사 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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