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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 없는 인생

나의 운명 속에 여분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 찾아와도 당장 급한 것은 서울과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누나가 남매지간이란 인연 때문에 억지로라도 당분간 부담을 덜 느낀 것뿐이다.

그런데 당장 또 알게 된 것은 이젠 이 고장에서는 옛날처럼 행동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것이었다. 유명세가 뒤에 붙어 다녔다.

길을 갈려하면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는가 하면 골목길 같은 데서는 중학생이나 국민학생들이 아무개 지나간다고 떠들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시선을 나의 곁에서 떼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의 신세가 정말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이겨야 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서 아는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내 몫의 일당을 벌었다.

부지런하게 이력서를 만들어 어떤 일자리이건 찾아 쏘다녔지만 얼굴 덕분에 나에게 맞는 자리가 없다고 퇴짜를 더 많이 맞았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이빨없는 사람들은 잇몸으로 씹는다는 격언처럼 남을 의지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자신과 부딪치면서 그날그날 일을 찾았다.

나에게 생기는 일은 궂은 일뿐이었지만 그런 일도 피할 수 없었다. 비누를 배달하는 등 틈 나는대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거들어 주었고 고철장사도 시작하였다.

나의 수중에는 두 달만에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서도 얼마간의 돈이 남았다. 나는 다시 나의 꿈을 찾아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을 하였다.

서울 가서도 부산에서처럼 막일을 할 결심이 생겼다.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뿐이었다.

늦은 가을 날 나는 또 수중에 몇 달치의 하숙비를 지닌 채 급행이란 글자가 끼인 보통급행 열차의 창가에 앉아 스치는 풍경을 감상적으로 느끼며 꿈과 낭만을 지닌 채 서울로 올라갔다. 나의 입가에서는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그 날 나는 오후 늦게 서울 바닥에 나타난 것이다. 새로 맞추어 입은 양복에다가 넥타이까지 맨 정장한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의젓했다.

어느 날 잘 아는 선원으로부터 얻은 외제 선글라스까지 끼고 보니 지금 모습은 내가 보아도 옛날의 내가 아닌 것이다.

당사로 들렀더니 불쑥 나타난 나를 본 동지들이 여간 신기해 하지 않으면서도 반가워 했다.

그 날 저녁 나는 10여명이나 넘게 있었던 동지들을 데리고 근방에 있었던 관철동의 싸구려 술집으로 찾아 갔다. 오래간만에 생두부 안주까지 주문해서 빈 속인 동지들의 배 속에다 막걸리를 채우게 한 것이다.

주전자가 몇 개나 바뀌었다. 모두 얼근한 기분인지 이야기가 길어진다. 안면이 있는 주모가 호기를 부리는 우리 일행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돈 걱정이 되는지 점점 거북한 얼굴을 보인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고 얼마 되지도 않는 먹걸리 값을 두고 걱정말라고 안심시키니 술집 주모가 말끔해진 나의 모습이 신기한지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술기가 오르는 것만큼 나의 마음도 부풀어갔다. 술집을 나올 때에는 모두 비틀거리면서 제 갈 길로 손을 흔들며 뿔뿔이 가버렸다.

혼자가 된 나는 길가에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지닌 얼마의 돈을 믿고 인근에 있는 3류 여관에다 하루 저녁을 묵기로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 있었다. 온종일 피로했던 몸은 술기 때문인지 금방 밤을 새게 하였다.

나는 그날로 사직동 쪽에다가 당분간 있게 될 하숙을 구하였고 나의 서울생활에서 부딪쳐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의 하숙집에는 당의 젊은 동지들이 여러 사람 찾아왔다. 값싼 소주와 오징어 다리 안주가 시간의 흐름에서 빈 속인 배 속에 열기를 올린다.

세상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이야기는 당직 개편에 대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일을 벌리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한 사람 두 사람 흥분하기 시작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웬일인지 이런 난처한 문제를 나에게 떠 넘기려고 일을 꾸민다. 나는 당시 모인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연소했다. 그런데도 흥분은 저희가 하면서도 나의 눈치만 살핀다.

그 날 오후 늦게 당사의 사무실이 지난번 있었던 사무총장의 독자적인 인사 때 불만으로 중앙당 중견 간부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런 행동을 타협적으로 처리하자고 만류하려던 당 최고위원의 설득도 실패하자 당의 원로들이 당사를 나갔다. 당사의 출입문이 안에서 걸렸다.

당시 당의 사무차장이었던 이강백 동지는 단식 제의를 하자며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말자고 제의를 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의견에 더욱 흥분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당의 형편에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나약한 당직자들의 형편에 딱한 마음도 생겨났다. 앞일을 대비하지 못하는 지도층의 사정이 일을 만든 것이다. 흥분된 사람들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술을 마신다.

밤은 깊어갔고 현실에 대한 만족보다 서글픔이 나의 마음 속에 쌓여 갔다.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한다는 분노가 생겼다.

나는 마루바닥을 훔치는 걸레의 나무자루를 뽑아 들었다. 술에 취한 채 입을 열었다.

「이번 사태는 현직 국장단의 잘못이며 그러니 각 부서 국장들은 반항하면 죽여줄 것이니까 앞으로 나와」

나는 고함을 지르며 주위에 침묵을 요구했다. 그때 나의 험한 표정을 보고 반발하려는 국장들도 있었지만 아우성을 치며 좋아하는 나의 지지자들 때문에 아무도 개인적으로 대들지는 못했다.

나는 주위의 현직 국장들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하였다. 서울생활에서 눈치만 남은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는 위험을 느낀 때문인지 굴욕을 느끼면서도 몇몇 국장들은 나의 엄포에 눈치를 살폈다.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아무도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어제의 제의에 밤이 새어도 굳게 닫힌 문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종로경찰서의 정보과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두 명의 정보 형사가 평소 자기네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내려고 하였다. 우리는 당내의 문제에 외부가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면회를 사절하자 경찰관들이 돌아갔다.

당의 최고위원이었던 이동화 선생께서 24시간 만에 이런 일이 생긴 사태에 대하여 정중한 사과의 말로 우리에게 이성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당 사무총장이며 당직개편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몽 선생은 현실을 인식하고 당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의를 했다.

단식 농성은 그런 것을 확인하고 끝이 났다. 모든 당직자의 사퇴서가 제출되었다.

전 사무총장이었던 이 몽 선생은 나를 개별적으로 다방으로 불러내어서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네가 청년국장의 가장 적임자였지만 현주소지가 부산이었기에 또 당시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 출신을 내정하였던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남자답게 서로 그런 문제는 잊어버리자고 화끈하게 나왔다.

나는 비로소 이 사람도 그릇이 크다고 느끼며 하루 동안에 대한 일보다 앞으로 당을 위해 노력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두 사람은 서로 거북한 마음들을 금방 씻어버렸다.

전 사무총장과 헤어진 나는 이틀만에 비지백반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걱정을 했다.

대중당 정치위원회가 다음날 긴급히 소집된 결과 제출된 국장단의 사표가 수리되었고 사무총장 서리에 경북·의성 지구당 위원장인 이원수 동지가 임명되었다.

새로운 당직 개편과 더불어 당의 살림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사직동에 있던 하숙에서 나오면, 내자동에 있던 대한 홍익회의 사무실인 김우제씨의 집과 당사를 내왕하며 한 달 두 달 소일하는 동안 내 수중에는 또 돈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돈버는 일을 시작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동지들과 만나서 대화가 시작되면 다급한 생활문제에 대해서는 잊혀지는 것이었다.

무익한 꿈 속에서 헤매던 어느날이었다. 결국 나는 보따리를 꾸리기 시작했다.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두고 수중에 돈이 거덜이 난 채 겨우 부산행 기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나에게 닥친 사정을 모르는 동지들은 내가 없으면 당의 혁신이 안 된다고 붙들었지만 누구의 말도 나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지 못했다. 정말로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국을 사랑했고 소속 정당을 사랑했고 동지들을 사랑했다. 핑계 때문에 남을 수 있는 처지라면 무슨 핑계든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형편은 정이 듬뿍 든 동지들과 나를 떼어 놓았다.

내가 서울을 떠나는 날 당의 동지들과 그동안 사귄 당 외의 친구들이 10여명이나 서울역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서로가 말 못하는 사정들 때문에 역전 근방 싸구려 술집에서 안주없는 소주잔에서 위안을 찾으려 애썼다.

최희수 동지가 자기 형편에 무리를 해서 기차표 한 장을 구하여 나의 손에 꼭 지어주며 섭섭한 표정으로 설쇠고 올라와 같이 활동하자고 떠나는 날 위로해준다.

신민당의 총재비서로 있던 이경식 동지가 주간지 두 권을 사주며 차안에서 읽으라고 내밀었다. 서울역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배웅해주러 나온 동지들은 차표가 개찰되는 출구까지 따라와 힘찬 악수로 나의 심란한 마음을 위로했다. 나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지정된 나의 좌석을 찾아 걸어갔다. 금방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밖에는 불빛이 어둠 속에서 빠르게 지나쳐버린다.

내일 아침이면 기차가 부산역에 분명하게 도착되겠지 하고 당연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석표를 산 사람들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려고 의자 옆에 기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옆 자리에는 미인이라고 말하기에 적당한 젊은 여인이 곱게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이성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된 젊음 때문인지 자꾸만 어떤 파문이 일어나려고 한다.

차 타기 전에 마신 술이 취하지 않고 말똥말똥 정신을 깨워갔다. 주간지를 펼쳐보는 마음 가장자리가 자꾸만 주간지 위에서 여인한테로 시선이 옮겨갔다.

수원역을 통과한 기차가 어둠 속에서 더욱 속력을 더하며 레일 위로 미끄러지는 바퀴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 야릇한 흥분이 이는 속에서 주간지의 책장만 바쁘게 넘기며 옆 좌석에다 대고 말을 붙였다.

「부산까지 갑니까?」 속이 보이는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돌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몇 마디의 대화가 그때부터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오고 갔다. 그런데 금방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아쉬움이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여자와의 대화가 계속될 수 있다면 내 마음도 기차가 달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또 말을 만들었다.

「우리들의 인연은 이 기차가 종착역에 닿으면 끝나겠지요.」

여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또 말문이 막혔다. 이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할 수 있는 적당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만 나는 실례되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인연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유혹해도 되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말을 해놓고 내가 너무 경망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했다.

여자는 오히려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자신있어요? 하는 대답에 나는 금방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실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한 나의 대답일까. 여자도 나도 서로 말을 해놓고 웃었다.

조치원을 지나는 기차는 속력을 더 내며 달린다.

기차를 탄 사람들은 밤이 깊은 탓인지 거의가 졸고 있었다. 나의 입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닫혀버린다. 대전까지 열차가 달리는 한 시간 가량 나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차가 대전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많이 기차에서 내린다. 기차가 대전역을 출발했을 때는 입석 승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차 안은 비기 시작했다.

옆 좌석의 여자는 무엇인가 혼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열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을 불렀다.

2홉들이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돈을 내고 샀다. 금방 오징어 다리를 찢어서 입속에 물고 씹었다. 마개를 딴 술병을 입에다 대고 호기를 부리며 용을 썼다.

굉장한 알콜기운이 몸에서 생겼다. 금방 속에서 불이라도 붙을 것만 같았다. 속이 알콜기운에 메슥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신이 점점 몽롱해졌다.

나는 나의 팔을 뻗어서 옆 자리의 여자 어깨 위에 걸쳐버렸다. 깜짝 놀란 여자가 토끼 눈이 되어서 무엇하느냐고 항의를 했다.

나는 술내가 풍기는 입을 벌리며 이제 슬슬 유혹해 보는 것입니다 하고 말을 내뱉었다. 막무가내인 나의 행동에 여자는 오히려 가만히 있었다.

힘겹게 기차가 추풍령을 오를 때 우리 두 사람은 옛날부터 사귀던 사람처럼 부담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다정하게 자리를 좁혀 앉아 상대에게 기댄 채 힘든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속에는 알지 못하는 아쉬움이 일어난다. 기차가 조금 천천히 달렸으면 하는 기대보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역을 통과하는 열차가 너무 빨리 달린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출발역에서 생긴 종착역까지의 인연이 순간의 아쉬움을 쌓으며 결국 기차가 부산역에 닿게 했다.

열차에 탔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모두 일어나 출구 쪽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를 부딪치며 역의 광장까지 나왔다.

광장에는 희미한 아침의 먼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끄집어냈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난 것입니까?」

여인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지나가는 것 같더니만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나의 물음에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재미 있었습니다. 안녕!」

나는 큰 가방을 든 채 바쁘게 길 건너를 향해 뛰었다. 여인은 한참 동안이나 이런 철부지같은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새벽에 운행하는 버스 위로 올라갔다. 차 안은 이른 시간 때문인지 승객이 없이 한산했다. 버스는 달리기 시작한다.

창을 통해 나의 시선은 광장 쪽으로 여인을 찾아보았지만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무엇인가 아까운 물건을 잃었을 때 느끼는 아쉬움이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나의 행동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아침이란 강렬한 빛이 도시를 비추자 나는 다시 현실이란 소용돌이 속에 묻혀 들기 시작했다. 비릿한 바닷가의 바람이 나의 얼굴에 부딪힐 때마다 내 마음 속을 지배하던 이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나는 방 문제에 대한 현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외투를 가지지 못한 나의 나들이는 겨울이 무척이나 춥게 느껴졌다.

이곳 부산에는 나를 위로해 줄려거나 도울려는 사람은 없었다. 내 스스로 현실이란 문제에 무조건 뛰어들어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하숙비 조달을 위해 체면이고 무엇이고 팽개치고 나니 나에게 떨어진 일자리란 게 아침나절 여자들이 일하는 미장원을 찾아다니며 위생비누 같은 걸 배달하는 것이 생겼다.

친구들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필요한 일 거리를 찾으며 1972년의 봄을 맞았다.

나의 가슴 속에는 환상처럼 떠오르는 새로운 애정이 쌓였다.

조국을 위해 죽은 영웅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선인들의 행동이 제멋대로 머리에 떠오른다.

뜨거운 피가 온몸에 솟았다. 나의 생활은 오직 떳떳한 생각 한 가지만으로 현실을 멀리하며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날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거리를 흥분시킨다.

현직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 이라는 사람이 서슴없이 「나 김일성을 만나고 왔소. 평양 갔다 왔소.」하고 말한 것이다.

나라 안이 금방 단 한 사람의 이야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싶어 흥분이 되었고 매스컴은 이런 문제를 무슨 위대한 계기가 온 것처럼 떠들어 대었다.

나는 금방 나의 오장육부 전체가 차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또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두렵고 어두운 마음이 생긴다. 남북한 양쪽의 위정자들의 의중에 대하여 어떤 실소가 생기기도 하였다.

내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놓은 것 같은 낭패한 마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결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신에게 감사할 수 없는 예감뿐이었다.

한 사람이 수천만 명의 동포를 우롱하려는 재주에 나의 양심은 감동도 기대도 없었던 것이다.

답답한 것은 양심을 그냥 지니고 살자니 눈앞에서는 순박한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일이 생각나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 할 뿐이었다.

출세를 할 만큼 해놓고서도 더 출세를 하겠다고 억지를 부려대는 사람들 꼴을 볼 때는 양심이 부족한 자가 욕심만 많아가지고 현대판 진시황제가 되겠다고 서두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예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 기회에 출세를 해볼 모양인지 어떤 자는 이런 일에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런 일을 목격하면서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운 예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져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날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하는 뉴스가 생겼다.

국회가 국회의원들의 국정감사 기간 중에 해산되었다는 언론의 딱한 보도였다.

방송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런 일이 국가를 구하는 일이라고 억지 선전을 했다. 어쩌자고 이 사람들은 또 혁명을 하는 것인지 주위의 이야기가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장 달라지는 것은 정권의 선전은 들을 수 있어도 국민의 의사는 매스컴 같은 곳에서 들을 수가 없었다.

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닫았는가, 반복되는 슬픈 역사의 전개 앞에서 젊은이의 마음 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꾸만 막혀버리려는 목구멍 속에서 억지로 말이 튀어 나온다.

나의 양심은 이런 일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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