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구하기 위해서
아내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내가 필요로 했던 돈 40만원을 융통해 가지고 왔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둔 대로 망설이지 않고 행동을 서두르며 일을 시작했다.
40만원의 돈은 모래 값과 부선비, 외선비, 그리고 육지의 양륙비까지는 절대 부족한 돈이었으나 부딪쳐 보아야 하는 것이 나의 사정이 되었다. 끝내 나는 배를 빌려가지고 섬진강으로 올라갔다.
부산 시내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건달인 내가 모래장사를 시작한다니까 금방 섬진강에 소문이 퍼졌다.
밤새도록 크레인이 물 밑의 모래를 부선에다 싣는 동안 나는 한잠도 자지 않고 조금이라도 모래를 배에다 더 싣기 위해 배 옆에서 서성거렸다.
뒷날 잠에서 깨어난 부선 선주가 배에 실린 모래를 보더니 짐이 너무 많이 실려서 항해를 못한다고 길길이 성질을 부린다. 나는 그를 잘 타일러서 배를 끌고 나왔다.
외선 선장도 나의 얼굴 때문인지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내일 한낮이면 부산에 배가 도착을 할 수 있다는 외선 선장의 말만 믿고 육지 쪽에 올라 차편으로 부산에 먼저 내려왔다.
나는 배가 도착하면 모래를 즉시 양륙하기 위해 모래 하역용 크레인을 구하려고 여러 곳을 쏘다녔다.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어색한 것이 많았지만 결과는 다 처리가 된다.
내가 장사를 한다고 소문이 나니 나를 아끼던 동지들과 주위의 사람들이 20명이나 구경을 나와 바닷가에다 술자리를 만들었다.
약속된 예정시간에 바다 위에 배가 보였다. 바닷가에서 기다리던 선주도 나도 안심이 되었다. 부선이 축항에 닿게 되고 준비한 크레인이 모래를 땅 위로 퍼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땅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찾아와서 따지기 시작한다. 누구 승낙으로 이곳에 모래를 양륙하느냐고 서슬이 시퍼랬다. 그 사람은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20여명이나 모여 있던 주위의 친구와 동지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 관리인을 나무랐다.
길길이 뛰던 관리인이 지주회사에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시비가 생겼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나의 배짱으로 다음날 아침에는 완전하게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모래 무더기를 보고는 인근에서 일을 시켜 달라고 그 동리에 살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는 가까운 곳에 산다는 세 사람을 인부로 쓰기로 했다.
현장책임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어서 처가의 장인을 보고 물건을 좀 지키기 위해 나와 달라고 간청을 하여서 도움을 받았다.
처음 하루동안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답답해져서 공사장으로 주문을 받기 위하여 뛰어다녔다.
며칠간은 내가 맡아온 주문 외에는 팔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 군데 두 군데 단골도 잡히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사를 위해 새벽 3시 30분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강 얼굴을 닦고 국에 말은 밥을 한 그릇쯤 먹고 나면 4시가 된다. 어느날이건 그 시간이면 집을 뛰쳐나와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른 시간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주위에 흩어져 있는 나무조각을 주워서 불을 지피며 일꾼을 기다렸고 손님을 기다렸다. 효과가 나타났다.
일꾼들도 주인이 서두니까 다른 집 일꾼보다는 일찍 나왔다. 새벽 일찍 물건을 구하려면 차들이 다른 집에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와서 물건을 사갔다.
장사가 기틀이 잡히면서 나는 해가 지고 일이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착실히 감독을 했다.
점심 때가 되면 인부들이 보는 앞에서 라면을 한 개 끓여 점심으로 때웠고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었다. 시작한 장사는 생각하던 것보다도 수월하게 일이 풀려 나갔다. 처음 한 배를 판 것이 생각보다도 흡족한 이문을 남겨 주었다.
그때부터 내가 직접 섬진강까지 모래를 사러 갈 필요가 없어졌다. 부선 선주들이 모래를 싣고 와서 받아 달라고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모래를 적재해 둔 땅 지주회사의 직원들이 나타났다. 예상은 하였지만 괴로운 말을 한다.
나는 손발이 닳도록 사정도 하고 임대료를 형편껏 낼 것이니 도와 달라고 애원도 했고 어떤 때는 배짱도 부렸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니까 지주측과도 시비가 적어졌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인근 해양고등학교가 운동장으로 매립을 한 토지를 비싼 임대료를 받고 4군데나 모래장사를 하도록 다른 사람들한테 장소를 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장사의 경쟁은 치열했다. 약하면 망하고 강하면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속에서 경쟁을 해야 했다. 이럴 때는 나의 얼굴이 유리한 점도 많았다. 안면 때문인지 단골도 늘어갔다.
경험이 쌓일수록 마음 속에는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뚝심과 웅변은 한 사람의 착실한 인부 몫과 사장 역할을 해내기에 별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인부들이 혀를 내둘렀다. 점심 도시락을 싸와서 먹던 인부들은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나를 보고 기가 차는 모양이었다.
또 점점 일이 많아지니까 수입보다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해 처음 인근의 어설픈 인부들이 더러는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새로 바뀌는 사람들은 모두 삽질에는 능숙하였다.
어릴 때부터 중노동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노동판에서 사람을 다루는 나의 재질은 천부적이라 할 만했다.
일하러 나오던 나이든 사람들도 나의 앞에서는 죽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언제나 일과 사정을 구분해서 처리했다.
드디어 나의 앞에는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과 수 개월만에 우리가 짊어지고 있던 빚을 청산하고 나의 밑천으로 모래 무더기가 점점 커져간 것이다.
처음으로 처가 쪽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건달로만 보았다가 장인의 이야기에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경험없이 장사를 시작한 것이 6개월도 못되어서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을 두고 그때부터 또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돈을 벌 것이냐 조국을 구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이 생겼다. 다급하고 배고팠던 일들이 자꾸만 보였다. 또 한 쪽에서는 약속이 깨어져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가 나의 눈에 괴로움을 더했다.
슬픔과 어두움 속에서 자란 나는 내 가족을 울리더라도 어두워오는 사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력한 양심을 깨달았다.
비로소 나는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알게 되었다. 나의 가슴 속에 잠재해 있던 불길이 다시 일어나 나의 마음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진실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병들고 있는 사회를 구해야 한다고 결심을 했다.
눈앞에는 세상이 불신으로 인해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불의에 의해 매를 맞는 양심이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볼 때는 안타까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정의가 보이지 않고 힘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수사기관 민사사건 불개입 원칙이란 법률해석을 알고 나서부터이다.
양심인들에게는 독약처럼 쓸모가 없었고 협잡 성질이 있는 악인들한테는 보약처럼 효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뻔뻔스러운 악인은 닥치는 대로 빼앗고 사기를 치고 협잡을 하면서 민사라고 했다.
법은 공평한 것을 주장하면 된다. 선한 자가 욕을 본다. 뺏은 자를 뺏긴 자가 증오한다.
사람들은 점점 사회에 대한 애정을 잃어갔고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여 세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속단하는 습성이 생겨났다. 이런 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가슴을 저민다.
나는 소멸되어 가는 정의를 구하는 것과 파괴되고 있는 민족정기를 구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나의 가정생활보다도 더 급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며칠이나 이런 일로 고민하던 끝에 장사 밑천 중 반을 떼어서 이런 일에 쓰고자 서둘렀다.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은 사무실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곳 저곳 복덕방을 헤맨 끝에 부평동 사거리 쪽에서 5평짜리 사무실을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2만원으로 계약을 하였다.
남의 전화를 빌어왔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헌 집기도 얻어다 들여 놓았다. 이제 또 결심이 필요하였다.
어떤 일이든 정열을 쏟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었다. 사업장으로 나가느냐 동지를 찾아 거리를 헤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사람들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뜻을 전하였고 설득을 해보았다.
또 어떤 방법으로 나의 애정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칠 것인가를 골몰이 생각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