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외우는 암기사항
지금까지 외웠던 다른 군인 수칙보다 길게 연결된 혁명공약은 6가지나 있었고 점호 시간 때마다 소대원이 복창을 하며 외우게 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점호 시간이 되면 한 사람 한 사람 지적을 하면서 강압적으로 암기상태를 확인을 하였다. 다른 훈련병들은 잘도 외워대었고 금방 암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왜 혁명을 한 높은 군인들이 철학과 실천을 통하여 목적을 행하려 하지 않고 문장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애써봐도 이런 암기사항이 머리 속에 외워지지 않았다.
나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외우지 못했고 이런 나 한 사람 때문에 소대원들은 집단기합을 받았다. 이런 일이 생기니 소대원들은 점호시간만 되면 아예 내가 지적을 받을까 봐 모두가 함께 걱정을 했다.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오래 받을 때에는 그 고통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훈련병도 있었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나는 같은 훈련병인 소대원들한테서도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에게는 고문관(拷問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애가 탄 소대원들이 나를 두고 곧잘 이런 말로 핀잔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조국의 앞날에 대한 어떤 염려가 내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혁명공약 6가지의 말처럼 국가 재건 최고위원이란 군인 출신들이 조국을 힘차고 올바로 일으켜 세워 주길 바라면서도 군인으로보다 정치인으로서의 능력과 철학을 아직 알 수가 없었기에 성공한 자를 위한 찬양의 노래인 혁명공약이 나의 머리 속에서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무언의 일편단심으로 졸병신세에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내가 고문관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이 다음날 부끄러운 일이 안 되길 바랄 뿐이었다.
나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몇 번씩이나 죄없는 소대원들을 단체로 기합을 받게 하였다. 그런 후에야 6주의 훈련을 마쳤다.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초여름의 하루하루가 훈련소라면 신물이 날 것같이 싫어지던 훈련병들의 마음도 퇴소식을 하는 날에는 모두 밝은 표정으로 보인다.
새 군화와 군복으로 차려 입고 연병장에 모여 훈련소를 떠나야 하는 퇴소식을 가지고 나니 처음으로 우리 일행들은 작대기 하나의 이등병 계급장을 받으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또 퇴소식이 끝나자 군용 트럭들이 와서 우리들을 배출대까지 차에 태워 옮겨다 준다. 잠시 머물게 되는 이곳에는 날이 새면 떠날 사람들뿐이었다.
어떤 약삭빠른 사람들은 좋은 부대로 배치 받기 위하여 교제를 하는 자도 있었고 얼마를 쓰면 어디에 떨어진다는 루머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신상을 위해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이 훈련을 받고 배출대로 넘어온 동기들이 자기들이 가야 할 곳으로 명령을 받고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나 자신도 궁금증을 가지면서도 그동안 친분을 느껴온 사람들과 함께 떠나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남은 사람끼리 서로 병과를 묻게 되었고 초조한 마음 속에서도 뒤에 힘써 줄 사람이 없는 나는 상급부대에서 내려올 특명에 의하여 정해질 나의 행선지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행여나 하는 또 다른 기대뿐이었다.
그러던 날 오후였다. 주위에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가 기거하던 내무반에서 대기병들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개인 사물을 정리하고 집합하라는 연락이 전달되어 왔다. 나의 이름도 있었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하고 집합 장소에 모였다. 5일 동안 대기하던 같은 병과의 일행은 부산에 소재한 모 특과학교(特科學校)로 특기교육 이수차 떠나야 하는 명령이 내려진 사실을 알았다.
나의 마음 속에서는 행선지를 알고 나니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부산이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생활해 본 도시의 이름이었기에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마음 속에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배출대를 나온 우리 일행은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연무역에서 준비된 객차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나니 그렇게도 마음에 부담을 주던 논산이 차츰 뒤로 멀어지면서 기차가 열기를 뿜으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군용 열차는 조그마한 역에까지 정차를 하는 완행이기 때문에 목적지인 부산진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루 저녁이 지나가 버린 다음날 이른 아침 녘이었다.
의자에서 잠들었던 일행들은 고함소리에 모두 긴장하며 일어났고 기차에서 내리게 한 인솔자는 우리를 한 곳에 모아 머리 숫자부터 세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군용 트럭을 가리키며 우리 일행더러 각자 자기 이름을 호명하며 트럭으로 올라가게 하더니 숫자 파악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트럭은 시내를 질주하며 달려갔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이 도착지인 특과학교에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소대원이 편성되고 내무반의 막사가 정해졌다. 그리고 나서 온종일 긴장과 이곳에서 지켜야 하는 요식절차가 지시되어 왔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훈련소와는 달랐다. 이론과 기술교육뿐이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게 되니 처음 들뜨며 긴장하던 마음도 잠시요. 긴장이 온 몸에서 풀리며 여름이라는 계절 탓인지 학과시간이 되면 졸음을 쫓기가 힘들어 또 고통이 생겼다.
이곳 특과학교에서는 6주의 기간이 지나면서 교육생들한테도 주말이면 외출을 신청하게 해서 허용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혁명공약을 아직 암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출 신청이 처음으로 거절된 것이다. 부대마다 군인들한테 혁명공약을 억지로 암기 시켰다.
나는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여섯 줄의 혁명공약을 암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았다.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런 주말에 나는 외출신청을 하였다. 교육중대의 본부에서도 딱했던지 이번에는 외출이 허용되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잘 닦아서 광이 나게 하여 모자와 군복에 붙이고 신나게 길거리를 오래간만에 자유롭게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헌병의 검문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복장과 행동에 아무런 지적사항이 없음을 알고 그들이 부르는 쪽으로 걸어갔다. 헌병들의 요구로 외출증을 제시하였다.
순찰 중인 헌병은 어떤 지적도 하지 못한 채 외출증을 돌려주지 않고 한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헌병이 나를 데리고 간 곳에는 나처럼 외출증을 뺏긴 군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헌병들은 무조건 길가에 나다니는 졸병인 군인들을 찾아내어 통제하는 것이었다. 금방 헌병부대의 트럭이 와서 길가에 멈추어 선다.
트럭 위에는 여러 명의 헌병들이 무섭게 눈을 굴리며 이유를 몰라하는 군인들을 무조건 짐짝처럼 트럭에 싣고서는 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모처럼의 신나던 기분이 불쾌해졌다. 트럭이 도착하여 멈춘 헌병대의 뒷마당에는 여러 부대에서 외출 나온, 나와 같은 신세로 보이는 졸병들로 수백 명이 웅성거렸다.
한 사람의 헌병이 급히 걸어오더니 고함을 질러댄다. 십 열 종대로 열을 세웠다. 중위 계급장을 모자에 단 위관장교를 앞에 세운 여러 명의 헌병들이 몰려와서 주위를 에워싼다.
그리고는 우리한테서 빼앗아간 외출증을 가지고 한 사람씩 호명을 한다. 모두가 다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줄의 앞 사람부터 차례차례로 혁명공약을 외우게 하였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혁명공약을 외웠다. 다 외우는 군인에게는 외출증을 주면서 헌병대에서 내보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끝내 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헌병대에서는 나의 소속부대인 특과학교로 통보를 보냈고 소속 부대에서는 차편을 보내서 부대로 싣고 들어가는 대신 주었던 외출증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나는 군대 입대 후 처음 받은 외출을 이런 일로 취소 당한 것이다.
나는 그 후 여러 번 부대 안에서 저녁 점호 시간마다 지적을 받고 혁명 공약을 암기 못한 이유 때문에 기합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소대원 단체 기합까지 받게 했다.
그런 일이 자주 생기던 중 하루는 교육중대의 중대장이 나를 보고 학과장에 나가지 말고 남게 한다. 나는 나 혼자 남으라는 것에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중대본부로 찾아갔다.
중대장과 기간 사병들은 신기한 눈동자로 나의 부동자세로 굳어진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교육중대 인사계라는 사람이 무슨 공문같은 것을 읽어주었다.
「암기 불량으로 2일간의 중노동에 처함.」
특과학교의 징계위원회에서 명령서를 내려 보낸 것을 알려 준 것이다.
나는 중대장의 지시대로 한 자루의 삽을 들고 중대 본부의 인사계를 따라 부대 옆 공지로 나갔다. 인사계는 나한테 흙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씨는 잠시 만에 땡볕 아래서 삽질을 하는 몸을 금새 땀으로 범벅되게 해 버린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처럼 오래간만에 나의 가슴 속에도 답답한 마음이 삽질을 할 때마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런 나를 두고 땡볕에 서 있기가 어려운지 감독을 하고 있던 교육중대 인사계가 쉬지 말고 열심히 구덩이를 파라는 말 만하고 그만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나는 주말마다 외출이 거절되었다. 텅 빈 내무반에 혼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은 혁명공약처럼 정말로 실행할 것인가.
자기 네들은 약속을 지킬 의무나 사명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냥 우리 졸자들에게 찬사의 문장이나 외우게 하는 것이 그 사람들 취미인가 묻고 싶었다.
3개월 간의 교육 기간 중 마지막 일주일이 남은 주말에야 나에게도 외출이 허용되었다. 나는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의 마음 속에 고통의 추억이 쌓인 거리로 군복을 입고 마음껏 호흡을 하며 걸었다.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나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 우리들은 마지막 일주일을 이곳에서 남겨두고 있었다.
1군과 2군을 두고 모두 교육생들의 마음은 후방에 떨어지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간간히 내무반 안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누가 어디에다 줄을 대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누구 누구는 어디에 떨어진다는 말이 나돌았다.
배경도 없고 돈 대줄 사람도 없었던 나에게는 숫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1군인 전방부대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의 이런 생각은 특과학교의 교육이 끝난 다음부터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로 호송이 되었다. 또 며칠을 기다리니 이번에는 경기도였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돌아다닌 끝에 떨어진 곳이 1군 관할의 직할 기술대대였다.
그러나 이곳의 신기한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반년이 못가서 딴 곳으로 또 옮겨가야 했다.
보충대를 거치고 거친 끝에 내가 간 곳은 최전방 사단의 소총대대였다. 나는 비로소 내 신분에 맞는 곳에 오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부대의 TO만큼 들어오고 나갔다.
나는 먼저 배치되어 온 병사들과 함께 어울려 근무하는 동안 이곳의 사병들이 좋아졌다. 배경이 있다는 자랑을 하는 병사도 없었으며 부잣집 아들이라고 뽐내는 사람도 없었다. 계급의 존엄성에 의해서 규율은 지켜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우리 나라의 영토로는 최북단인 삼팔선 이북 지역에서 근무하는 병사들 속에는 다른 부대처럼 탈영병도 간간히 생겼으나 대부분은 같은 처지끼리 그래도 주위에서 전우애를 느끼면서 병사로서의 사명을 지켜가고 있었다.
나의 계급이 고참 일등병이 될 때쯤에는 나는 소속부대 안에서 제법 강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부대 안에서는 나보다 한 등쯤 높은 상등병 정도 군인들은 나의 요령 앞에 도전하지 못했다. 다른 졸병처럼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양껏 밥을 먹었다.
중대 취사병들이 나한테서 골탕을 먹은 후부터였지만 나는 제법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나의 상사인 부대 선임 하사나 인사계, 또 중대장은 장난기 섞인 마음으로 부대의 궂은 일이 있으면 꼭 나를 차출하여 내보냈지만 그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골탕 먹이려는 상사들의 짓임을 알았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나보다 졸병인 후임자들에게는 인기가 늘어갔다. 반면에 중대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골치거리였다.
이런 속에서도 세월이 지나자 상등병으로 올라갔다.
나의 몸에서는 오래간만에 힘이 샘솟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군대생활이 나에게 있어서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행복한 곳이었다.
그런 어느날 나는 휴가 특명을 받았다.
날씨는 제법 쌀쌀한 아직도 살얼음이 끼는 늦은 겨울이었던 것이다. 보급품의 사정이 좋지 않던 당시의 전방부대 사정은 몇 벌의 사지군복을 보급 창고 안에 보관시켜 두고 휴가병한테만 잠시 입고 갔다 오게 했다.
나는 그 소중한 옷을 받아 입고 부대에서 지급해 준 얼마 안 되는 휴가비였지만 제법 돈까지 타고는 군용 열차를 이용한 휴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장 떠오른 나의 기억 속에는 갈 곳이란 부산뿐이었다.
그래서 부산행 군용열차를 이용했다. 부대를 떠난 후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데도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이른 새벽, 기차에서 내려 부산의 낯익은 거리를 보면서 오래간만에 형제들을 생각하고 영도 쪽으로 찾아가기 위해 길을 걸어갔다.
평소 모아 둔 몇 봉의 건빵과 한 보루의 화랑 담배를 선물인양 손에 들고 형의 집을 찾아 간 것이다.
남의 땅 위에 지어진 무허가인 4평짜리의 판자집은 지금은 썩은 나무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거렸고 바깥바람이 방안에 들어오는지 덜덜 떨며 군용담요를 감고 있는 가족들의 표정이 측은해 보였다.
근 2년만에 나를 보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도 얼굴에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무엇인가 당장 걱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방 안에서 내놓는 건빵을 보고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어른들은 아이들 보고 삼촌도 좀 먹게 하라고 말을 했다.
나는 이곳의 처지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동안 모았던 돈과 휴가비로 받은 돈 전부를 내어놓았다. 가족들은 웬 돈이냐고 사양하는 척 했지만 그것은 그들에겐 퍽 소중한 것이 되었다.
나는 형의 가족들이 측은했다. 이런 것이 정이라는 것일까.
20여일 간의 휴가기간 중 옛날처럼 굶주리게 되었고 아는 집에서 무슨 일거리가 생겼을 때는 서슴없이 잡부 일을 도맡아 해주고, 그렇게 해서 받는 적은 돈은 형수한테 건네 주었다. 그러던 나는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날을 맞았다.
국제시장에서 낡은 군복 한 벌을 샀다. 나는 부대로 들어가야 하는 날 나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형제를 위해 내가 휴가 복으로 부대에서 입고 왔던 새 군복을 벗어주고 낡아서 헤어진 군복을 다려 입고서, 부대에 돌아갔을 때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귀대 길을 서둘렀다.
추운 계절도, 어려운 일들도 견디려는 마음 속에는 하나의 옛 이야기처럼 희미한 추억을 남기면서 지나갔다.
나는 고참 병장이 되었다. 신기한 것은 군대의 급식 때문에 더욱 강해진 나의 뚝심이었다.
사단 체육대회에서는 각 부대에서 뽑혀 온 다른 연대의 씨름 선수를 넘기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개인 1등을 한 사실이었다. 군대에 지원하던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허약하던 내 신체가 군대의 급식으로 몇 년만에 건강하고 강해진 것을 느꼈다.
비로소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정말 이 시기에는 나의 젊은 마음은 조국에 대한 애정과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부대 내에서는 병사들의 눈이 이런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게 했다. 나는 주위에서 강한 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즈음 부대 연대급 웅변대회에서도 당당히 1등을 하였다. 나의 웅변과 뚝심은 장병들 속에서 대단했다.
내가 어린 시절 나 자신을 지켜왔던 싸움 실력은 나를 얕잡아 보던 연대 내의 제일의 유단자였던 태권 4단짜리와의 대결을 통해서 상대의 입을 봉하고 나서부터는 나의 또 다른 신화가 부대 내에 알려졌다.
어떤 허풍을 친다 해도 연대 안에서는 병사들이 아무도 나를 두고 거짓말을 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사단 내의 다른 부대에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졌다.
배짱 좋고 뚝심 세고 말 잘하며 머리 좋은 사나이라는 이런 소문은 인근의 도시나 민간인이 사는 동리에도 알려졌다.
나의 가장 활기 찬 젊음을 병영생활로 보내면서도 나는 군대생활에 만족할 수가 있었다.
부대 내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병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걸어 준 덕택에 어떤 문제도 잘 처리하게 되었다. 군기가 문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연대 내에서는 내가 소속된 대대를 두고 카츄샤라고 부를 정도로까지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 소속 대대의 수백 명 장병 중에서는 큰 문제가 나오지 않게 됐으며 탈영병도 줄고 있었다.
나의 신분은 안면이 있는 지휘관이나 장교들로부터 열외사병(列外士兵) 대우를 받았다.
전우들은 나를 그만큼 뛰어난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