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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인생

버림받은 아이

 

李 三 漢

 

1942년 4월 6일, 그 날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았던 봄날이었다.

나는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우동골 이라는 두메산골의 외딴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주위에는 이웃이 없었고 집은 숲 속에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지 못했고, 나는 태어나던 날부터 내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두고 끝없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바깥일을 못한지가 오래였고, 어머니는 제 땅 한 평 없는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혼자서 도맡아야 했다.

손위로 다섯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허기에 지쳐 있어서 다른 식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형편이 못 되었다.

나의 울음소리는 여느 아이들의 울음소리보다 컸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해보았지만 나의 울음은 계속되었다.

같은 방안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는 나의 울음소리에 신경질을 부렸고, 어머니는 행여나 그런 아버지가 나를 해칠까봐 몸으로 감싸야 했다. 그 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젖이 나오지 않는 빈 젖꼭지를 내 입에 물렸다.

나는 태어나던 날부터 충분히 먹지 못했고 누구의 따뜻한 보살핌도 받기가 힘들었다. 나는 울다가 지치면 잠이 들었고 눈을 뜨면 다시 우는 일부터 시작을 했다.

가족들은 그런 내가 정말 짐스럽기만 했다. 다섯 형제는 나의 출생으로 더욱 기가 죽었고, 병석의 아버지는 날마다 같은 일을 보면서 성질을 부렸다.

태어나서 며칠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기어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나는 그때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나의 큰 울음소리에 아버지는 넌더리를 내며 더욱 성질을 부렸다. 그럴 때면 병든 남편과 철없는 다섯 자녀를 부양해야 하던 어머니로서는 누구의 편을 들어 줄 기력조차 없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워야 하던 가족들에게 허기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가족들은 나의 울음소리마저 들어야 했고, 여덟 식구가 살기에 너무나 작았던 단칸방에는 날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가족들의 손에 의해 산 속에 버려져야 했고, 외진 숲 속에 버려진 나는 큰 소리로 울어댔다. 나의 울음소리에 인근에 있던 짐승들이 몰려들었다.

아무런 대항능력이 없던 나는 나의 운명을 하늘에 맡겨야 했다. 이상한 일은 그 곳에 있던 짐승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고만 있었지, 어떤 짐승도 나를 해치거나 나의 곁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내가 다시 가족들의 품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뒷일이 궁금했던 가족들이 나를 버린 곳에 다시 왔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곤하게 잠들어 있는 나를 보고는 집으로 업고 왔던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이 울어야 했고 가족들은 그런 나를 애물단지로 여겼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심하게 울면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당황해 했다.

"전생에 내가 무슨 큰 죄가 있어서....." 하던 어머니의 푸념은 차라리 고생을 덜 하고 내가 일찍 죽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것이다.

당시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나를 키우고 돌보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젖은 말라 있었고, 집안에는 특별히 나에게 먹일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형편에 나의 울음소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일손을 놓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그토록 어렵지는 않았다. 힘깨나 쓴다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아버지는 석수 일도 잘했고 화전 일도 잘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집에는 수입원이 끊어졌고, 재산이란 재산은 아버지의 치료비와 약값으로 탕진되다 보니 가족들이 머무를 곳조차 없게 되었으니 외딴 곳에 버려져 있던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일본은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부족한 물자들을 마구잡이로 징발해 간 탓도 있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었던 우리 가족들은 더더욱 생계가 막막했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삶아서 끼니를 만들어 내야 했던 어머니의 몸에서는 모유가 나오지 않았고, 나 역시 어머니의 모유대신 나무껍질을 우려낸 물을 먹어야 했다.

나의 생명은 끈질겼다. 아무도 내가 온전하게 생존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형제들도 나에게만은 정을 주지 않았다.

나는 낮에도 잠을 자야 했다. 잠이 깨이면 허기를 느꼈고 그래서 나는 또 울었다. 내가 울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병석에서 역정을 냈다.

어린 내 곁에서 역정만 내던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도 그 아들로부터 '아버지'란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한 채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 산다는 것이 더욱 힘들어 졌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어리기만 한 자식들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어머니에게는 산다는 것도 힘들었고 죽는다는 것도 힘들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모르고 살았던 공포가 밤이 되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음침한 숲 속에서는 밤만 되면 방아소리가 들렸고, 작은 짐승들의 울음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한 우리 가족에게 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 태어나서 먹을 것만 찾다가 끼니 한 번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하고 자라던 쌍둥이 형제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4살의 나이로 차례로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숲속의 외딴 오두막집에는 이제 다섯 식구만 남았다.

어머니는 더욱 지극 정성으로 기도만 했다. 이제는 어머니에게도 숲속의 오두막집에 정이 가지 않았다.

열 다섯 살이 된 딸을 식구들의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산너머 동네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후처로 보냈다. 어머니가 한 말은 '너 하나만이라도 배곯지 말고 살라'는 것뿐이었다.

나이든 신랑을 따라가던 누나는 몇 번이나 동생들을 뒤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셨고, 그 동생들은 누나가 이제부터는 어머니의 말처럼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고 배고픔을 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오두막집에는 어머니와 한 살 짜리 나와 여섯 살 짜리 딸과 11살 짜리 아들만 남았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허기뿐만 아니라 밤을 새우는 일이 더욱 힘이 들었다. 밤이 되면 들리는 방아소리가 그랬고, 밤이면 보게 되는 인불(燐火)들이 그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간 곳은 우복리라는 마을의 박석골이었다. 이사를 간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박석골이란 지명이 그 바위 때문에 생겼다고 했다.

나는 그때쯤 제법 걷기도 했고 말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사를 가자마자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녔다. 한 낮이면 누나도 집에 있지 않았고 형도 집에 없었다.

두 살배기인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집을 지켜야 했고, 스스로 외로운 자신을 보아야 했다.

박석골에서의 생활은,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곡식으로 지은 죽이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았다.

동리에서 궂은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언제든지 그 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일이 없는 날이면 함지박을 들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하던 일은 포구에 나가서 생선을 사다가 팔러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포구까지는 12km의 거리였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생선을 사게 되면 그것을 팔기 위해서 마을마다 집집마다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하루 30km이상의 길을 걸어야 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으로 무거운 생선함지를 머리에 이고 온종일을 걸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집에 오면 나는 그런 어머니를 쉬지도 못하게 했다.

나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꼭지를 만지며 하루종일 외로웠던 내 마음을 달랬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잠들 때까지 자신도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어머니가 잠이 들 때면 나는 그 어머니의 잠을 깨웠다.

한낮이 되면 가족들은 볼일을 보러 다 나가버렸고 집에는 항상 나만 혼자 남겨져야 했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외로움도 느끼게 되었고 어리광도 늘어났다. 오후가 되면 집 앞의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먼 곳에 어머니가 생선함지를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것이 보이면 큰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아들의 소리를 듣는지 못 듣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나는 그때부터 큰소리로 울었다

내가 울기 시작하면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동네에 다 들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남 보기가 부끄러워 생선함지를 그대로 머리에 인 채 집으로 와서 나를 때렸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나를 달랬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나의 이런 일에도 차츰 어머니는 냉담해졌고, 나는 또 다른 방법을 이용하여 어머니를 불렀다.

내가 4살이 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나의 행동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우리가 살던 박석골에서 300m 정도 내려오면 굴이 하나 있었다. 그 굴은 일본사람들이 철도를 놓기 위해 뚫어 놓은 터널이었다. 사용하지 않던 그 터널 안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었는데 수심이 2m정도나 되었다.

내가 떼를 쓰며 울어대도 어머니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굴로 간다, 굴로 간다"

그러면서 천천히 굴 쪽으로 걸어갔다. 그 소리를 들은 근방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급히 전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우동골댁' 이라고 불렀는데, "우동골댁! 아들이 지금 굴에 들어갔다." 하면서 빨리 가보라고 재촉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내가 물에 빠져 죽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서있던 굴 앞까지 와서, 머리에는 함지박을 인 채로 등에는 나를 업어서 집안에 데려다 놓고 잠시 머물다가 갔다. 그래서 나와 어머니 사이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었다. 내가 굴 앞에 서서 울면 굴속에서는 나의 울음소리가 메아리 쳤다.

1945년 8월 15일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날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조선이 해방되었으니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들을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에도 우리 가족들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자라면서 점점 더 상세히 알게 된 것은 우리 곁에는 친척도 많지 않고, 또한 아무도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소반 위에 냉수를 떠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도를 해야 했던 이유는, 생활 중에서 위안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기도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큰아들인 형을 위해 기도했고 형이 잘 되어서 집안이 잘되기를 기대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어떤 때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승려 한 사람이 우리 동네에 나타났다. 그 승려는 동네를 다 돌고 나서 마을에서 가장 작은 우리 집에도 들어왔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집에 있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시주 받으러 나온 승려에게 제사 때 쓸 양으로 천장에 매어놓았던 곡식 봉투를 풀어서 얼마쯤 그릇에 덜더니 승려의 바랑에다 부어 주었다.

그때 염불을 외우고 있던 승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저 애가 시주 님의 아들입니까?"

승려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는 얼른 그 승려를 마루에 앉게 했다. 승려는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아이를 자기 절에 맡길 수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그 말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승려는 한참동안 마루에 앉아서 어머니와 무슨 말을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천에서 용이 났어." 승려는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다른 마을로 가버렸다.

내가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는, 나도 이제는 어머니를 찾지 않고도 이웃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산에 가서 땔감을 주워오게 되자 어머니를 괴롭히던 일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어떤 날은 보리밭을 뛰어다니며 장난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떤 아이가 하는 말이 "니는 후레자식이야!"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 말을 하던 아이한테 대들었다.

"니가 후레자식이다." 그러자 "니 아버지 있나?" 하며 그 아이는 오히려 나에게 대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와 묻노?" 나 역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상대 아이는 '니 아버지 있으면 내놔 봐라.'하며 약을 올렸다.

나는 그때서야 왜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 아이는 "삼한이는 후레자식, 애비없는 후레자식" 하며 깡충깡충 뛰면서 노래를 불렀다.

다른 아이들이 금방 그 아이를 편들며 같은 소리로 복창하고 나를 놀렸다. 나는 참고 참다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김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도 나를 편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집으로 부리나케 내달았다. 나는 내가 당한 수모를 풀 곳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아버지 어디 있노?" 다짜고짜 아버지를 찾는 나의 행동에 어머니는 당황해 했다.

"아버지가 없다고 애 들이 나를 놀려, 아버지가 없으니까 내가 후레자식이래!"

엄마는 내 말을 듣더니 금방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회초리를 들어 나를 때렸다. 나는 아버지의 일로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고 어머니에게서는 매를 맞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가족에 대한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왜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없고 일가 친척도 없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으면 세상에는 이가가 김가보다 더 많이 산다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더욱 확인할 수 없는 말들이 궁금해서 그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먼 산을 가리키며 저곳을 넘어가면 일가친척들이 산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타성(他姓)받이 이고 가난한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다보면 짓궂은 아이들의 말 때문에 자주 울어야 했다. 후레자식이라고 놀려대면 내가 꼭 무슨 죄를 짓고 추궁을 당할 때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새로운 설움이 복받쳤다. 어머니는 그래도 그 짓궂은 아이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철부지 아이들의 짓이라고 얼버무리지만 속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나를 놀리던 아이들의 집에서 일도 해주고, 물건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아이들이 나를 놀려도 그 일에 끼어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놀림을 받고 나면 집 앞의 큰바위 위에서 며칠씩 혼자 놀았다.

나는 아버지의 제삿날이 돌아오자 어머니가 차려 놓은 제사상을 앞에 두고 절을 했다.

내가 절을 하는 것은 어머니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지만, 그 제삿날에도 아버지를 뵐 수는 없었다.

나는 여섯 살이 되면서 제법 집안 일들을 거들게 되었다.

봄철이면 눈앞에 아른거리던 아지랑이를 보면서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도 느꼈고, 누나가 학교에서 배워온 노래도 혼자서 곧잘 불렀다. 그 해에 형이 돈을 벌어 오겠다면서 부산으로 떠났다.

누나와 나는 매일같이 어머니를 도와 땔감을 마련하고 반찬거리 나물을 뜯으러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큰아들을 생각했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부엌과 굴뚝 뒤에서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했다. 부처님, 용왕님, 칠성님, 산신님, 조상님께 큰아들의 이름을 대며 제발 그 아들이 아무 탈없이 잘 있게 해 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어떠한 신에게도 나에 대해서는 한 번도 빌지 않았다. 어머니의 소원은 다만 큰아들인 형이 빨리 잘 되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마을의 아이들 중에는 심심하면 나를 때리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보고도 나의 주위에는 누구도 그 아이들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울음을 터트리면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기만 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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