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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談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는,​

 깨달음만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건질 수 있는 길이요,​

 깨달음만이 자신의 끝없는 내세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일     시: 1998년 5월 31일

장     소: 국제정신문화연구원

대 담 자: 원장  이 삼 한

정     리: 편집부

 

 

깨달음의 길

 사람은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깨달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거나 정확한 가르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깨달음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삶이 우리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다. 그러나 수 천년 전에 오직 한 사람만이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인간 세계에 깨달음을 위한 길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왜 이토록 좋은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까? 사람은 의식의 조종에 따라 활동을 한다. 자신의 의식에 맞지 않는 일은 받아들이지도, 제대로 볼 수도, 그리고 제대로 전할 수도 없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인간이 자신을 축복하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인간이 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의 영적인 사고가 인간 만큼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 동물이라 함은 의식을 통해서 알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계획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등도 의식의 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자신의 의식 속에 선업이 없는 자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한다. 이러한 사실은 4대 성인의 삶과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삶에서 목격된다.

 

 아무리 깨닫고 싶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 없다. 즉, 깨달음의 성취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속에 있는 일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이것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 속에 존재해 온 일에 의해서 거부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인연이 없으면 부처도 중생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인연이 없는 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 속에 좋은 인연이 지어져 있지 않으니 좋은 인연과는 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깨달은 자가 나타났을 때 그의 옆에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 대중은 그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82세의 나이로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끝없는 도보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칠 수 밖에 없었다. 문명의 혜택이 없어 도보로만 여행을 해야 했던 부처가 설마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런 대접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을 깨우치고자 했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에 의해 해침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사약을 받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하는 극형에 처해졌으며 노자는 일생 동안을 떠돌다가 죽어야 했다. 그런데 왜 후세의 사람들은 그들을 성인이라고 부를까? 그것은 그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그들의 가르침 속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성인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죽고 나서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살아서는 성인이 아닌 가장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인간들이 인간 세계에 깨달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로하여금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인간 세계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거나 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위에서 언급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깨달음과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진실에 대한 눈을 뜨기 위해서 이다.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깨달은 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근원의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근원의 세계에는 업을 가진 상태에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업이 완전히 소멸될 때 근원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근원의 세계는 바로 모든 것이 죽고 태어나는 자리이다.

 

 근원의 세계를 본 자는 현재의 세상에서 단 두 사람 밖에 없다. 한 사람은 석가모니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공통적으로 보게 되는 세계는 근원의 세계이고 해탈의 세계이다. 해탈을 한 자만이 근원의 세계에 들 수 있으므로 해탈을 한 세계가 바로 근원의 세계인 셈이다.

 

 완전한 진실을 얻게 된다는 것은 거짓에 물들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해탈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깨달을 수 없다. 즉, 마지막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완전한 진실의 눈을 뜨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가정을 버리고 입산수도를 해야 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입산수도를 한다 하더라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가족을 버리고 입산수도를 위해서 히말라야 산맥 등과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노력해온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행위를 한 것이다. 즉, 자신 속에 업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깨닫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이런 상태에서 깨달은 자가 나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입산 수도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어떤 특정한 수행 즉 진리적인 방법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더 큰 업을 만들고 있었다.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을 했다고 본다. 이런 일들은 오늘의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깨달음은 사람들의 욕망이나 희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르침이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성취했고, 사람들을 깨닫게 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석가모니도 사람들에게 ‘있는 일을 보아라!, 있는 일을 배워라!, 있는 일을 알아라!’라고 가르친 것 밖에 없다. 있는 일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석가모니는 자신이 본 대로 설명했다. 바로 그 있는 일이 사람들을 깨우치는 길이다. 그래서 그는 있는 일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스승의 임종이 자리에서 물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면 이제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까?"

 "자신을 통해서 배워라.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나의 것을 가르친 것이 없다."

 이 말은 석가모니가 세상에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 세상에 있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을 보게 하는 길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잘못을 할 때 그로 인해서 당연히 그 업보를 받게 되고, 내가 잘 할 때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의해서 자신이 얻게 되는 결과를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자신이 한 일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옳은 사람이다. 옳지 않은 사고를 가지고 살다보니 정당한 것을 거부하고 정당하지 않는 것을 바랐다.

 

 지금의 세상은 더욱 그렇다. 산에 가서 기도한다고 먼 길도 고된 산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정 바위 밑에 가서는 수천 원, 수만 원, 수십만 원을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거기에다 빨간 물감으로 쓴 부적을 한 장 붙여 주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도 내어놓는다. 이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헛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일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거짓을 버리지 못하면 절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채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석가도, 예수도, 그 밖의 모든 성인들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시대는 말세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자신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기대하다 보니 거짓이 난무하게 되고, 속임수가 난무하게 되고, 남을 괴롭히는 일이 난무하게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상이 좋을 수가 없다.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은 좋아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그 문제들 속에서 살게 된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을 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다. 무지가 자신을 속게 만들고, 남을 속이도록 만들고 있다. 무지는 깨달음의 적이다.

 

 무지한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믿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을 보존하는 것조차 어렵다. 인간의 의식이 망해버리면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고, 식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 어떤 것으로든 변화할 수 있다. 의식 자체도 망하면 다른 의식으로 변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실을 얻는 것이다. 진실을 자신 속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이런 일을 두고 다양한 관찰을 행한 결과 그 해법이 될 수 있는 비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염 물질이 가득한 물동이에 맑은 물을 계속 부으면 그 물동이 속에 있는 물의 오염 정도는 계속해서 낮아지게 된다. 같은 식으로, 계속해서 있는 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실이 깨어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까닭에 자신의 진실을 깨우쳐야 한다. 진실이 깨어나도록 해야 한다. 좋은 가르침은 인간을 깨우친다. 어떻게 인간을 깨우치는가? 있는 일을 두고 깨닫게 한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은 무지해서 있는 일을 두고 사람을 깨우치려 하면 아무도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한 자는 자신 속에 있는 업의 작용에 따라서 자신을 움직인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있는 일을 보고, 그 있는 일에 맞추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깨우침이 큰 자들은 자신 속의 업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일을 보고 있는 일에 맞게 움직이기 때문에 업이 자신 속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뜻은 활동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활동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 활동도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세상에 온갖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업도 활동이 없으면 죽어버린다.

 

 깨우침이 크면 업의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일을 보고 그 있는 일에 맞게 행동하게 되므로 업이 할 일을 잃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업은 약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진실은 커진다. 깨달음이 없으면 자신을 망하게 하고, 깨달음이 있으면 자신을 점점 좋은 쪽으로 만들어 간다. 계속해서 진실이 커져서 업이 작아지면 수행을 통해서든, 고행을 통해서든, 사랑을 통해서든 해탈은 가능해진다.

 

 세상의 일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은 단순하게 정해져 있다. 단순한 뜻에 의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것을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내기가 너무나 어렵다. 오늘날 인간들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온갖 것들을 알아내고 있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 기술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사람을 깨우쳐야 하는가?’이다.

 

 한 사회가 망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변고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가 망하기 전에 먼저 망하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이 망하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우리들을 움직이고 있는 의식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사회에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고 그 어려운 일들이 우리의 삶을 암울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잘못된 일들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깨우치고 난 이후에는 아무리 나쁜 일을 강요받아도 나쁜 일을 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의식 속에 있는 일 때문이다. 사람들을 깨우치지 못했을 때에는 그들이 좋은 일을 하도록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들은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이것 또한 의식을 있게 하는 뜻이다. 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사람을 망치게 되고 사람은 사회를 망치게 된다. 사회는 인간을 바탕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사회를 바탕으로 존재한다. 사회와 인간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관계이다. 그러한 까닭에 사회에 나쁜 사람들이 득세하면 사회는 망하게 되고, 사회에 좋은 사람들이 득세하면 사회는 좋아지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를 알아보자. 과거 고타마 붓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해탈을 했고, 근원의 세계를 보았으니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이 없어져야 한다. 진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거짓이 없어져야 된다는 것은 진실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옳고 그름은 어디에 있는가? 옳고 그름은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일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어떤 일이 옳은 결과를 만들면 옳은 일이고 나쁜 결과를 만들면 나쁜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하더라도 있는 일을 모르면 좋은 일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있는 일이 어떻게 해서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 있는 일이 좋아지고 나빠지는가 하는 인과의 법을 알아야 한다. 그 속에 있는 뜻을 알아야 한다.

 

 셋째, 양심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있는 일을 밝히는 것처럼 힘들고 외로운 일은 없다. 과거의 성자들의 삶이 그러했고, 우리의 역사 속에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다. 세상을 좋게 만들려면 있는 일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러한 까닭에 양심과 용기가 없다면 있는 일에 아무리 눈을 떴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넷째, 끝없는 사랑이 자신 속에 있어야 한다. 끝없는 사랑이 있어야 남에게 가서 가르치려 할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전생에 끝없는 깨우침이 있어 그 깨우침을 통해 끊임없이 있는 일을 보고 있는 일을 통해서 배웠다. 끝없는 활동이 자신의 업을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다. 작아진 업을 태우기 위해서 그는 고행을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일구월심(日久月深)의 열망의 끈기가 자신 속에 불을 일어나게 했고 그 불로서 업을 소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너무나 힘들다. 그러한 가르침은 여차하면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고타마 같은 사람은 억겁의 세월을 통해서 선업을 쌓았기 때문에 악업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악업이 큰 자가 그런 가르침만 가지고 노력할 경우, 자신 속에 있는 문제에 의해서 폐인이 되어 버린다. 신체의 기관을 망쳐 버린다는 말이다.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할 때, 타이어 내의 기압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면 그 타이어는 터져 버린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다룰 때 그것이 견딜 수 있는 힘을 넘어선 압력이 가해질 때 그 물질은 붕괴되어 버린다. 몸의 기관도 정신적 압력이 계속 가해진다든가, 자신이 버틸 수 없는 압력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손상을 입게 된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자신이 과거의 세상에서 얼마나 선행을 했는가, 혹은 무지하게 살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자신 속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달은 자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그는 자신이 깨달은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깨달은 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 얼마나 많은 공덕을 지었는지, 그리고 어떤 존재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모두가 똑 같다. 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공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가 언급한 공덕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기꾼에게 돈을 주고 속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기꾼이 ‘당신은 큰 공덕을 지었다’라고 하면 무지한 장님과 같은 사람들은 그 사기꾼의 말에 자신이 공덕을 지은 줄 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이 무지한 사람은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 인지 알지 못한다. 말로만 들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깨달으면 누가 밥을 가져다 주는가? 돈을 가져다 주는가? 출세를 할 수가 있는가? 이런 점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중요한 사실은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 스스로 획득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돈이 필요하면 일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남의 금고를 털어서 돈을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 온다. 그런 방식으로 왕이 되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근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는 태어나면 성군(聖君)이 되거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고 했다. 이미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나 크게 부귀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것들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을 태워야 한다. 있는 일을 찾아서 자신을 태워야 한다. 있는 일을 알고 열심히 일하면 속이 탄다. 증오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속이 탄다. 속을 태워라. 그러면 그 일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남을 위해서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속을 태우는 것과 속을 끓이는 것은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속을 끓일 때는 속이 아프다. 증오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속이 끓는 것인지 속이 타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 세상의 있는 일을 이해하고, 가족의 일을 안타까워한다든지 세상 사람들의 일을 안타깝게 생각할 때 가슴이 탄다. 마음이 타기만 하고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속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더워지는 것은 속이 타고 있음을 뜻한다. 증오심이 생기면서 속이 아프거나 쓰린 것은 속이 끓는 것이다.

 

 속이 끓어서 증오심이 생기는 것은 업이 쌓이는 것이고,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고 속이 타는 것은 업을 태우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제대로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들과 그 대상의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된다. 그 안타까움이 자신을 태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절이나 교회, 혹은 어떤 단체들에 가야 공덕을 짓는 것은 아니다. 자신 속에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담았는지, 그 깨달음을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얼마나 많이 얻었는지, 얼마나 많이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때 바로 그 행동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행동 속에서 불이 일어날 수 있고 그 불이 자신의 업을 태운다.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진리 속에 있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이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태워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진리가 대단한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단하게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있는 일 그 자체이며 눈만 뜨면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진리이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축복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다. 깨달음이 자신을 축복하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속에 있으며 자신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 보내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육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암기 위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을 다른 나라들의 교육과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교육은 암기력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 속에 있는 많은 문제를 머리에 주입해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학생은 어떻게 될까? 시험을 치르면 백 점을 받는데, 공장에서 일을 시켜보면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교육이 오히려 사람의 의식을 망친다.

 

 깨달음을 주지 않는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교육은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스스로의 창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자신 스스로 어떻게 해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에게 혹은 다른 어딘가에 미루어 버린다.  

 

 있는 일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뜻에 의해서 살게 된다. 사회의 영향에 의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에 의해서 살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살아야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을 망쳐 버렸고 그런 인간이 사는 세상은 망하기 직전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 번 망해버린 사람이 다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모든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는 깨달음만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건질 수 있는 길이요, 깨달음만이 자신의 끝없는 내세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자신을 잘되게 한다. 만일 사람들이 세상의 일을 깨닫게 된다면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스스로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다. 망하지 않는 자신을, 영원한 자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좋은 길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어떻게 보는가? 남자와 여자가 은밀한 곳에서 나누는 애정 행위를 두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축복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상대에게 축복이 된다면 그것은 상대를 축복한 것이고 세상을 축복한 것이다. 내가 자식을 위해서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할 때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사랑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이다.

 

 절대 깨달음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깨우치게 되면 깨달음은 매우 쉽고 단순한 곳에 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잘못된 일들의 계속적인 활동이다.

 

있는 일이 자신을 깨우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바탕이 되는가 하는 것은,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대해서 더 이상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고 자신을 깨우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일을 통해 최고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 가르침만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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