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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인생

나의 어린 시절

 

 

李 三 漢

 

박석골 집에는 세 식구가 살게 되었다.

언제나 어머니는 장사 일을 나섰고, 작은 누나와 나는 땔감과 나물을 뜯으러 집을 비웠다. 그런 사이 나는 일곱 살이 되었고 이제는 식구들이 모두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도시로 나갔던 형이 집으로 왔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박석골의 우리가족을 두고 동네 사람들은 우동골댁이 이제는 살게 되었다 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봄, 나는 집에서 4km정도 떨어진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같은 또래의 낯선 아이들과 섞인 곳에서도 나의 모습은 금방 표가 났다.

허약한 체구와 남루한 의복이 여느 집 아이들과는 달리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속에 끼어서 나도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또 나의 기를 살아나게 한 일은, 학교에 나온 아이들 중에는 김씨 성이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아이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등교 길은 혼자서도 다닐 수 있게 익어 갔고, 어머니의 얼굴에도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자 우리 우복리에도 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이 학교는 초등학교의 분교로서 우복리 마을의 아이들만이 다니는 작은 학교였다. 교실은 두 개였고 선생님도 항상 두 분뿐이었다.

나는 2학년이 되면서부터 이 분교에 다니게 되었다. 새봄이 왔고 우리 집의 생활도 조금씩 여유가 생겨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장만한 우리 땅도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누나와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여름이 되자 마을에는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들렸고 도시로 떠났던 형이 돌아왔다. 얼마 후에 그 전쟁은 우리 마을에도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피난 행렬이 지나갔고, 다음에는 인민군들이 들어왔다. 그러자 산골인심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연일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먼 곳에서 나는 포성이 자주 들렸고, 전투기가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내는 소음이 귀청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자주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인민군들은 비행기를 크게 두려워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비행기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비행기가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전쟁이 일어나자 형을 두고 걱정이었다. 18살인 형이 혹시 잘못되기라도 해서 전쟁터로 붙들려 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근의 젊은이들이 날마다 인민군이 주둔하는 주재소로 끌려 나갔다. 인민군은 의용군에 지원하라고 강요했고, 개중엔 마지 못해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어느 날, 형이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형의 이야기로는 붙잡아온 사람들을 줄 세워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아무나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다그쳤다고 했다.

인민군 간부가 형의 앞에 줄 섰던 사람에게 "동무는?" 하자 그 사람은 선뜻 "예" 하고 대답했고, 그 다음 형에게 "동무는?" 하고 물었다. 형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저는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인민군 간부는 핀잔을 주며 형을 위협했지만 형도 자랄 때 제대로 먹지 못했던 몸이라 요행히 끌려가는 일을 면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에는 국군과 경찰이 들어왔다. 그러자 또 동네가 술렁거렸다. 국군과 경찰이 빨갱이를 색출하느라 연일 부역자들을 찾아내었다. 누구는 붙잡혀서 총살을 당했으며 누구는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다는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 집 식구들은 다행히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국군 쪽에서도 인민군 쪽에서도 별로 트집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너무 가난하게 살아 왔으므로 어느 쪽의 관심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군이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마을 사람들 중에 더러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전선이 멀어지면서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밤이면 언제 어디서 그들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군경 가족이나 생활에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걱정들을 했다.

전쟁터가 북쪽으로 멀어지면서 형은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예전처럼 장사를 시작했다.

교실이 두 칸밖에 없는 우리 학교에는 선생님 한 분이 세 학년씩을 맡아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했다. 수업시간 중에도 선생님은 자주 우리에게 군가를 가르쳤고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그 군가를 열심히 불렀다.

신이 도왔는지, 운이 닿았는지 알 수 없지만 차츰 우리 집에는 재산이 불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 가족의 얼굴에는 모두 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봄이 와서 내가 9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어머니가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병이 난 것이었다.

어머니의 병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의사가 다녀간지 며칠만 지나면 다시 어머니의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자주 의사를 부르러 다녀야 했다. 그나마 내가 데리고 오던 의사는 진짜 의사가 아니었다.

도시의 어떤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한 적이 있던 인근의 여자였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불어 오른 어머니의 배에 주사바늘을 꽂고 한참동안 물을 빼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숨을 내어 쉬었고 여자는 돈을 받고 돌아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이미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았는지 서둘러 형을 재촉해 결혼을 하게 했다.

그 해 겨울, 어머니는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직접 지켜보면서도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시련들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슬픔도 두려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이 집을 나가고 땅속에 묻히고 나자 나는 비로소 마음 한 부분이 없어진 것처럼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로부터도 애정을 느낄 수 없었고 내 마음속에 있던 어떤 일을 두고도 떼를 써 볼 곳이 없어진 것이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물정이란 아무 것도 몰랐고 산골 마을에서만 살아온 나는 어떻게 내 자신이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우리 집에는 4살 위인 누나가 나와 집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나에게는 날마다 서러운 일들만 생겼다. 동네에서 짓궂고 힘센 아이들은 나를 보면 아무 곳에서나 때리고 애를 먹였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던 나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내가 길가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나도 온종일 지게를 지고 농사를 지어야 했고, 겨울이 되어 산골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홑옷만 걸친 채 양말조차 신고 다니지 못하는 어린 나에게는 아무런 투정도 희망도 가져보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그나마 이런 날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건너 마을에 살던 영감 한 분이 누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과 논, 그리고 밭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형이 써준 양도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누나와 나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가 없었으며 우리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을 뿐이었다. 또한 주위에 어떠한 사람도 우리를 돕기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없었다. 도시에 나가 있던 형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세상에는 어린 나를 위로해 주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열 여섯 살이 된 누나를 동리 사람들이 주선하여,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것은 의지할 곳이 없어진 내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함께 살아왔던 누나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편 누나는 누나대로 의지할 곳 없는 나와 헤어져야 하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도 서로에게 눈물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가 시집을 가기 전에 우리 집과 마을을 떠나야 했다. 나는 단벌 옷에 부산에 갈 수 있는 차비만을 지닌 채 누나와 헤어졌다.

내가 떠나는 날 누나는 정성들여 아침밥을 지어 주었고, 내가 밥을 다 먹고 나자 마침내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고, 타향 역시 나를 기다리는 곳이 없었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는 친척집 주소를 적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걸어서 재를 넘어가 시외버스를 탔다.

시외버스는 내가 타기도 전에 이미 만원이었다. 빈 좌석이 한 군데도 없었고 통로에는 짐과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런데도 버스의 조수는 사람들을 짐짝처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버스는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버스가 중간 터미널에 닿을 때마다 장사꾼들이 올라왔고 장사꾼들은 내 앞에 먹을 것들을 들이밀며 사라고 권했다.

내 입에서는 군침이 돌았다. 그러나 나는 장사꾼들에게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아침에 탔던 시외버스는 저녁나절이 다 되어서야 부산에 다다랐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친척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꼭 쥐고 사람들 속을 걷기 시작했다.

"대신동이 어디 있습니꺼?"

나는 처음으로 낯선 사람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은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촌에서 왔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람은 전차가 다니고 있는 길을 가르쳐 주며 그 길을 곧장 따라 가라고 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전차의 마지막 정류장까지 오게 되었다. 눈앞에는 여러 대의 전차가 멈추어 서 있었고 더 이상 전차길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내 손에 쥐고 있는 주소를 보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켜 주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물은 뒤에야 친척이 사는 마을을 찾을 수가 있었다.

친척집은 시외버스를 내린 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친척집의 주소를 확인하고 대문을 두드리자 집안에서는 내 또래의 아이가 나와서 대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박석골을 떠나기 전에, 친척집에 가면 내 또래의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그 아이거니 생각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 하동에서 왔어."

그러자 그 아이도 하동에 친척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집안에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보자,

"니가 삼한이냐?"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박석골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며 잠을 잤던 형수뻘이 된다는 그 사람이었다. 형수는 나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고 잠시 하던 일손을 멈춘 채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는 대로 전부 말했다.

형수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내 또래의 아이에게 나를 소개했다.

"아재다." 그 아이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촌수는 조카뻘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친척 가족들은 모두들 마음씨가 좋았다. 그러나 차츰 시일이 지나서 내가 친척집의 사정을 알고 나서는 하루하루를 보내기에 눈치가 보여 힘이 들었다.

술을 좋아하고 호인이라고 소문이 나있는 형님뻘이 되는 분은 어느 회사에 나가 운전을 하고 있었으나 월급을 타서 제대로 집에 들여놓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형수가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형수는 시장에서 메밀을 사다가 묵을 쑤어서 날마다 새벽에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았다.

그런 일을 매일 보면서 나는 내가 그 집을 나올 때까지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을 먹고 나면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온종일 집안에 있을 수도 없었다. 할 일이 없던 나는 골목길 구석진 곳에 혼자 서 있었다. 그러자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내 곁에 와서 물었다.

"너 촌에서 왔나?."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며칠이 지나자 나의 소문이 퍼졌는지 여섯 살, 일곱 살배기 아이들까지도 나를 보면 놀리려 들기 시작했다. 꼬마들이 몇 명만 모이면 내 곁에 와서 노래를 불렀다.

"촌놈 핫바지, 촌놈 핫바지." 그러면서 나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꼬마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 꼬마들에게 대어들 수가 없었다. 꼬마들 뒤에는 그 아이들의 형이 있었고 부모가 있었다. 내가 꼬마들과 싸우게 된다면 어떤 일이 나에게 있게 될 것인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친척집의 조카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야 조금씩 동네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내가 마을에 내 또래의 아이들과 겨우 얼굴을 익히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또 난처한 일들이 생기고 있었다. 친척집은 그 동안 작지만 방이 두 개인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사를 간 집은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방이 하나 뿐인 곳이었다. 미닫이를 열면 방 밖은 길이었고, 화장실은 여러 집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친척집 식구들이 가장 불편해진 것은 잠자리였다. 밤이 되면 나는 끼어 잘 곳이 없었다. 나는 겨우 친척 식구들의 발 밑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친척 식구들이 발을 뻗지 못해 불편해 할까봐 작은 몸을 더욱 움츠렸고, 친척집 식구들은 그런 나를 의식하는지 다리를 오그린 채 밤을 새웠다.

나는 밤중에 목이 말라도 함부로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가장 난처했던 일은 밤중에 오줌을 누고 싶을 때였다. 내가 오줌을 누러 가려면 누워있는 친척 식구들을 건너서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오줌을 누었고, 혹시 밤중에 오줌이 나오려 하면 나는 그것을 꼭 쥐고 사람들이 일어날 때까지 참고 있어야 했다. 변소 역시 아무 때나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변소 앞에는 몇 사람씩 줄을 서 있었다.

새로 알게 된 동네의 아이들은 종종 내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붙였다. 나는 그때마다 내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싸움을 받아들였다. 나는 내 발에 맞는 신을 신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조카아이의 신발을 빌려 신고 싸웠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맞아서 코피를 흘렸고, 어떤 날은 내가 상대를 쓰러뜨리고 배 위에 걸터앉아 주먹으로 상대를 때렸다. 나는 싸움실력이 능숙해지면서부터 당당하게 내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밤이 되면 낮에 함께 어울렸던 아이들의 집으로 잠자리 동냥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내가 항상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친척집에 나의 짐을 덜어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 형을 만났지만 형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나 자신을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신문을 팔러 다니는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에게서 어디서 신문을 받아서 팔면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네의 아이들에게서 얻어 모은 딱지와 구슬을 판돈 10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돈10원은 신문 한 부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신문팔이 아이들이 신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나도 그 속에 섰다. 다른 아이들은 저마다 200원 아니면 300원 정도의 돈을 손에 쥐고 있었다. 줄 앞에서는 돈을 주는 것만큼 신문을 세어 주었다.

차례가 되자 나는 신문을 세어 주는 사람 앞에 내가 갖고 있던 10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상대는 신문 한 부를 내게 주었다. 나는 한 장의 신문을 들고는 다른 아이들처럼 거리로 뛰어 나갔다.

"내일 아침 국제신문"하고 나의 외치는 소리에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20원을 받고 신문을 팔았다. 나는 다시 그 20원으로 2부의 신문을 샀다. 그렇게 해서 나는 100원이 넘는 돈을 처음으로 내 손으로 벌 수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었고 라디오 역시 흔치 않았던 당시에는 신문은 뉴스거리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매체였다. 선거가 시작되어서 인지 나는 한동안 하루에 20-30장의 신문을 팔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신문 파는 일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아이스케키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공장에 아이스케키 통 값으로 보증금을 걸고, 통에 얼음을 채운 다음에 아이스케키를 받아 넣었다. 막상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거리로 나오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입 속에서는 "아이스케키, 아이스케키" 하면서도 그 말이 정작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영도다리 옆 바닷가에서 아이스케키 통을 내려놓고, 그 통 위에 앉아 바닷물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내 자신이 겪어야 했던 설움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햇살의 뜨거움이 수그러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자 나는 내가 깔고 앉아 있던 아이스케키 통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 있어야 할 아이스케키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이스케키들은 녹아서 단팥죽이 되어 버렸고 아이스케키 속에 있던 나무 꼬지 들이 통 속에 흩어져 있었다.

아침 일찍이 강냉이 죽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했던 나는 아이스케키 녹은 물로 점심과 저녁밥을 대신해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무 꼬지 들을 전부 골라 낸 다음 아이스케키가 녹은 물을 전부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아이스케키를 받으러 공장으로 들어갔다. 거리에는 이미 전등 불이 켜졌고 골목들은 어두워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둠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아이스케키, 맛 좋은 아이스케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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