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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장

배움의 길

 

 

정 회 심

 

 싱그러운 햇살이 가득한 1993년 4월의 어느 봄날, 나는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내가 영국에 간 목적은 8주 동안 영어 어학 연수를 받기 위함이었다. 8월에 뉴카슬 대학에서 강의가 있었다. 나는 3개월 가량 남은 기간 동안에 유럽 배낭여행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하던 날, 우연히 한국 교민이 발행하는 현지의 신문인 ‘영국 생활’에서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낯선 나라를 방문한 이튿 날부터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애초에 계획했던 일정보다 더 오래 영국에서 머물게 되었다.

 레스토랑은 9개의 테이블을 가진 작은 규모였지만 무척 손님이 많았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일주일에 4일은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주말 2일은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교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구석에 주저앉아서 퉁퉁 부운 다리를 주무르면서 불평도 했다.

 “무슨 손님이 이렇게도 많이 올까?”

 그런 날은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지기 마련이었지만, 아침이 되면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강의를 받으러 학교에 갔다. 레스토랑에서의 일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청소하는 일을 좋아해서 가게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 내고, 진공청소기로 바닥이 먼지도 깨끗하게 제거했다. 특히, 화장실을 윤이 나도록 깨끗이 닦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학 생활이 익숙해지자 영국에서 더 머물고 싶어졌다. 만료가 다 되어 가는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영어 학교를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문득 예전에 못 다한 미술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스도 다양했다. 1년 학비는 한국의 대학과 비슷했다. 파운데이션 코스라는 대학 준비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입학을 위한 인터뷰는 생각보다 쉬워서 무난히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간의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미술을 다시 시작한 것은 나에게 많은 활력을 주었다. 1년 코스를 마치고 난 후, 정식 대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더 좋은 많은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무엇이든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대학 인터뷰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초조했다. 기왕이면 준비를 더 잘하고 싶어서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스케치북 몇 권에 연습한 습작들과, 아이디어가 담긴 노트들, 엉터리에 가깝지만 내가 그린 그림들, 조각품을 찍은 슬라이드들, 그리고 에세이가 내 보일 수 있는 전부였다. 인터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창조력과 가능성을 말하며 인터뷰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3주 후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대학 1학년 첫 학기는 학교 익히기에 바빴다. 꽉 채워진 시간표에 따라 이 강의실, 저 강의실로 허둥지둥 뛰어 다녔다.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며 내 공부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작업들이 많았다.

 그 동안 영국에도 유학생 수가 점점 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유학을 한다고 해서 낭만과 보장된 미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많았지만, 놀면서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한 남학생은 도박으로 하루 밤에 1년 수업료를 날렸다. 유학을 다녀 왔다 하면 무조건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일터에서 대접을 받는 것은 빛나는 졸업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실함과 능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람의 능력을 평가해 보기도 전에 졸업장을 먼저 요구한다. 나는 적어도 그런 부류의 사람은 되지 않으려고 바쁜 일과를 스스로 만들어서 열심히 일했고 또 배웠다.

 어느덧 1학년이 끝날 때가 된 이른 봄이었다. 우연히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의 한 곳에 있는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에 가게 되었다. 그 곳은 누구든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외국사람들도 많이 왔다. 한 비구니 승려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의 신사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큰 소리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중년의 신사는 한국말로 정의, 양심, 사랑, 진리 등에 대해서 말했고, 비구니 승려는 영어로 통역을 했다.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말만 해서 어느 종교의 리더라고 생각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빈정거리며 놀렸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 예수, 알라, 부처님 등을 섬기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중년의 신사는 무례하게 대하는 대중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말했다.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있는 일을 배워야 한다. 있는 일을 알아야 한다.”

 그 용기를 보고 무척 놀랐다.

 1학년이 끝나자 나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체중이 10kg이나 빠졌고 한 달이 넘게 심한 설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가 기절한 뒤,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어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먹는 것도 잊고 쏟아지는 잠을 충당하느라 계속 잠만 잤다. 가족들은 나의 여윈 모습을 보고 걱정을 했다. 나는 잘 먹고 푹 쉬면 나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한의원에 가서 한약을 지어 주었다. 위와 장이 약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한약을 먹어도 병은 낫지 않았다.

 한국에 온 지 몇 주가 지난 후 영국에서 만났던 비구니 승려와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그 때 함께 보았던 중년 신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6주 동안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그 분은 특히 진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있는 일을 있게 하는 일이다.”

  매일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실을 놓고 이치에 맞게 설명하였다.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었다. 그 분의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나의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육체적 고통이 질병이라면, 이 질병의 원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답답했다. 몸이 아파서 참을 수 없었다. 그 분은 나의 상태를 이렇게 말했다.

 "기체로 만들어진 나쁜 기운이 체내에 들어가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인체의 기관에 무리를 주어 아프게 된다."

 좋지 않은 기운과의 접촉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해 지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병원의 검사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여전히 아팠던 것이다. 그 분은 선뜻 나의 이러한 병을 낫게 해 주었다. 그 분과의 만남은 이전에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 분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분에게는 깊은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몸이 아파서 한국에 돌아 왔을 때, 나의 심정은 빛을 잃은 등대와도 같았다. 영국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고 헤매고만 있었던 것이다. 몸이 아프고 보니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미래가 캄캄하다고 생각한 것은 현재 내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부질없는 이상만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고민을 그분에게 말했다.

그 분의 말은 당장 학업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정말 시원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학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희망도, 이상도 있고 식구들의 기대도 있었는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는 없었다. 이제 건강해진 몸으로 다시 시작해서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유학이라는 허구로 포장하지 말고, 지금 내 자신이 초라하더라도 용기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결국 나는 다시 영국에서 유학을 계속했다.

 그 해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영국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니 다시 학업에 대해 고민이 생겼다. 실력 없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졸업장이 필요한 것일까? 6000파운드를 낼 만큼 가치 있는 공부인가? 내가 그 만큼의 돈을 내고 배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인가? 곰곰이 생각하니 자신이 부끄러웠다. 작년보다 훨씬 바쁘게 보내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 문제를 두고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겁한 자가 되기 보다는 당당한 태도로 열심히 사는 사회의 일꾼이 되고 싶었다.

 새 봄이 되었다. 그 분은 영국에 또 왔다. 나는 내가 그 분에게서 받은 교훈을 다른 사람도 받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미팅을 주선하고 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 주제는 인생이었다.

 “왜 우리에게 삶이 소중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이 끝없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은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강연 내용은 멋진 것이었지만, 거기에 모인 학생들에게는 어려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학생도 있었다.

 그 분은 다시 하이드 파크에 가서 피켓을 들고 대중을 향해 소리쳤다. 또 런던 시내 중심부 거리에도 나앉았다. 거리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진리를 들으라!”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간혹 장난기 있는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를 둘러싸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그 분은 무례한 사람들에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너희들이 예의를 갖춰 정중히 질문하면 그 답을 내가 말해 주겠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사람씩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사람 물었다.

 "무엇이 진리냐?"

 그 분은 자신의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장님이 이 주먹을 볼 수 있느냐?"

 "보지 못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진리는 보편 타당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인데, 어떻게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느냐?"

 “진리란 무엇인가?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 속에 문제가 발생하면, 좋고 나쁜 것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진리인 것이다.”

그 분이 길거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 분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새로운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내가 영국으로 유학을 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한 것은 실수였다. 학교에서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분에게서 들은 말들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휴학계를 냈다. 휴학계를 들이밀자, 교수는 즉시 안 된다고 했다. 학교에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난 화가 났다. 내가 똑똑해서 좋은 학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외국학생이어서 많은 수업료를 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학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학장은 먼저 왜 휴학계를 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휴학계를 내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다.

 “학교에서 특별히 배우는 것도 많지 않은데 수업료는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름방학 3개월, 겨울 방학 3주, 주말 이틀 빼고 나면 도대체 일 년에 수업이 몇 일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미술 공부는 재료비도 만만치 않은데, 학교에서 재료를 넉넉히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들어서 못 다니겠다. 수업료를 깎아 주던지 장학금을 주면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실력보다도 내가 외국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외국 학생에게 주는 혜택은 아무 것도 없다. 많은 외국 학생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밖으로 맴도는 경우가 많다. 영어 실력이 제일 큰 문제이긴 하지만, 주입식 공부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은 학생 자신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야 하는 서양의 자율적인 공부 방식을 무척 힘들어한다. 더 한심한 학생 중에는 학위나 받자고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비위나 맞추는 경우도 있다. 학교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뒤로 처지는 학생도 있다. 그 결과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에 떨어져 누락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잘못 유학 온 것이고,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학장은 내 말을 조용히 들으면서 인정을 했지만, 나의 휴학계에 대해서는 회유하기 시작했다. 나의 결정에 대해 주위사람들은 반대를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분명했다. 먼저 학비를 낭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내가 하고 있는 미술 공부는 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공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제 세상을 알고 싶었다. 사회에서도 일을 하고 싶었고, 여행을 통해서도 세상의 일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지금 휴학한지 1년이 지났다. 한국에 돌아 온지도 몇 달이 지났다. 영국에서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많은 일들이 생각나지만, 특히 레스토랑에서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한 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유학하는 동안 열심히 일을 했기에 자립도 할 수 있었다. 바쁘고 힘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예전처럼 앞날을 걱정하며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달력을 펴놓고, 1년 치 또는 몇 년의 계획표를 만드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외롭지 않은 나를 만드는 일,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 나를 만드는 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일, 그리고 남을 축복할 수 있는 나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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