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가야 여행기(1)
김 미 옥
1994년 10월 10일, 우리 일행 3사람은 '부다가야'로 가기 위해서 '캘커타 역'으로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가야할 다음 목적지의 티켓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역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창구마다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에서 아무나 붙잡고 부다가야로 가는 열차표를 어디서 파느냐고 물었다. 저쪽으로 가라고 하여 그리로 가면 다시 다른 쪽으로 가라고 했고, 그 쪽으로 가면 또 우리의 말을 들은 사람은 다른 쪽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한 역 안에서, 부다가야로 가는 열차의 표를 파는 창구를 찾는데 만도 반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다시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우리가 겨우 찾아간 창구 앞에는 다른 어느 방향으로 가는 창구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당일에 떠나는 열차표를 구할 수 있을 지 없을 지가 당장 걱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형 컴퓨터 한 대를 놓고 표를 팔고 있는 역무원의 느릿 느릿한 행동 때문이었다.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 긴 행렬의 뒤쪽에 줄을 서 있던 우리는 언제 표를 살 수 있을 지 암담했다.
그때 우리 곁에 건장한 남자들이 접근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열차표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에게 표를 사주겠다는 사람들을 붙잡고 당일 떠나는 열차표의 가격을 물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잠시 기다리게 한 후 어디론가 갔다 오더니 당일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부르는 표의 구입가격은 역에서 파는 것보다 몇 배나 비쌌다.
우리는 그들과 거래하지 않기로 하고 아예 캘커타 역의 역장실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역장을 만나서 우리의 인도여행 목적을 설명하고, 오늘 꼭 부다가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급하게 열차표를 구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결국 표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역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호텔로 돌아와서 조금 있다가 리더가 혼자 밖으로 나갔다. 금방 다시 들어온 리더는 영어통역이 필요하다면서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호텔의 근처에는 배낭족들이 찾는 값싼 숙소들이 많이 있었고, 그 곳에는 여행객을 상대해서 장사를 하는 상점들과 싼 비행기표를 구해 주는 작은 여행사들이 있었다.
리더는 한 여행사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에게 그의 말을 통역하게 했다. "이러이러한 열차표를 살 수 있는가?" 우리의 말을 한참 듣고 난 그 여행사의 주인은 우리에게 다른 한 집을 소개해 주었다.
그 집은 길거리에 있었는데 전화 한 대와 의자 두 개를 앞에 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리더는 그 작은 가게의 주인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열차표를 구할 수 있는가?"
그러자 그 가게의 주인은 종이 한 장을 내면서 행선지와 우리가 원하는 기차의 등급을 자세히 적어 달라고 했다. 우리가 적은 것을 주니 가게 주인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 가게의 주인은 오늘 것은 안되니 내일 것을 해주면 어떻겠느냐 고 물었다. 그때 리더는 가게의 주인에게 흥정을 했다.
"프리미엄을 더 붙여 주겠다."
주인은 우리에게 얼마를 더 주겠느냐고 물었다. 리더가 한 사람 당 1,000루피라면 티켓을 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1,500루피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리더는 그 중간을 내겠다고 했다.
주인은 다시 열심히 여기 저기 전화를 해댔고 얼마 후 우리가 원하는 열차표를 구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게의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은 후, 가게의 주인이 적어준 열차의 이름과 번호, 그리고 좌석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았다. 가게 주인은 기차를 타면 객차의 책임자가 와서 표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저녁 8시에 캘커타 역에서 떠나는 기차를 탈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탄 열차의 객차는 인도에서 중류층 이상이 이용하고 있는 객차였다. 우리가 주문했던 것은 4인이 들어갈 수 있는 침대 칸이었지만 막상 찾아 간 우리의 좌석은 6명이 들어가는 2등 칸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일행 외에도 다른 인도인과 함께 칸을 이용해야 했는데 더구나 표를 구입한 인도인 외에도 표를 구하지 못한 다른 인도인까지 함께 있어야 했다.
열차의 차장은 기차가 새벽 두 시 반쯤에 '가야 역'에 닿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분실할까봐 항상 신경을 써야 했는데 우리와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인도인들은 계속해서 영어와 인도어를 섞어가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차표가 없이 타고 있던 인도인은 열차의 차장이 지나갈 때마다 이등 칸의 침대표를 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리는 행여나 가야 역을 지나칠까 염려가 되어 열차가 역에 닿을 때마다 그 역을 확인했다. 그런 중에 다음날 새벽이 되었고 열차의 차장이 우리에게 오더니 다음 역에서 짐을 가지고 내리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지친 몸으로 각자 소지품들을 챙겨서 열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가야 역에 내려야 했던 이유는 부다가야에는 기차역이 없기 때문에 부다가야로 가기 위해서는 가야 역에 내려서 다시 일반 차량을 타고 가야 되는 것이다.
가야 역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시장 바닥처럼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역의 구내 구석구석에는 사람들이 맨바닥 위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고, 불빛이 있는 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날벌레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1등 칸과 2등 칸 손님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2층의 입구에는 한 여인이 일반승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차표를 확인했다. 그 휴게실은 여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과 남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한쪽에는 화장실과 세면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 휴게실의 시설들은 우리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여기저기 천을 깔고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몇 개의 의자가 있어서 겨우 우리 일행은 잠시 쉴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소지품들을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어 한쪽에 물건들을 모두 쌓아놓고 그것을 지키느라고 뜬눈으로 밤을 세워야 했다.
리더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리더가 왔다. 리더가 흥정을 해서 대절을 하게 된 차량은 '릭샤'라고 하는 것으로,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몇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만든 차로서 인도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작은 차였다. 이 릭샤는 작은 바퀴를 3개 달았고, 좌석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끼어 앉을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 일행 셋은 그 작은 차에 큰 가방 세 개와 함께 올라타게 되었는데 그 차에는 우리 일행 외에도 운전사가 또 한 사람의 자기 친구를 태웠다. 그리고 나서 릭샤는 출발했다.
우리는 초행길이라 사방의 길들이 모두 생소했고, 또 밤이라 경계심 또한 늦출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릭샤는 반 시간쯤 달리더니 엔진이 멈추고 말았다. 우리는 바짝 긴장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운전사는 태연히 연료가 떨어졌다고 했다.
리더가 우리에게 "어떤 불상사가 생기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힘껏 달려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리는 극한 상황에 대비하면서 운전사가 연료를 구해오기를 기다렸는데 한 시간쯤 후 그 운전사가 연료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릭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다가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캘커타에서 부다가야로 출발하기 전에 미리 부다가야에 대한 약간의 상식과 우리가 묵을 수 있는 숙소들을 알아두었기 때문에 차를 '부탄 템플' 앞에 대어놓고 안으로 들어가서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구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우리와 방을 흥정하던 승려가 1층에 있는 방의 숙박비는 하나에 80루피이고, 2층에 있는 방은 하나에 400루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80루피 짜리의 방을 정했다. 80루피는 당시 우리 나라 돈으로 2,400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리더는 방에 소지품을 챙겨두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우리에게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부다가야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식당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열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옆에 와서 유창한 일본어로 우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마침 내가 일본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거리의 한 쪽 외진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천막을 쳐서 한쪽에 좌판을 깔아놓고 길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한국의 포장마차와 비슷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 식성에 맞지 않는 음식들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밥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밥 외에도 우리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인도의 전통적인 향내가 나는 음식들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갔던 김을 꺼내어 작게 잘라서 밥과 맵고 향수 냄새가 나는 반찬을 조금씩 섞어서 김 속에 싸서 겨우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자 우리에게 아까 식당을 가르쳐 주던 아이가 다시 따라붙었고 또 그 옆에 다른 아이들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행여나 그들이 우리를 괴롭히지나 않을까 해서 거절을 했지만 그들은 안심하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먼저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메인 템플' 쪽으로 가게 되었고, 그 메인 템플의 가까이 있던 한 가게의 주인을 소개받게 되었다.
가게의 주인은 우리가 그 곳에 온 목적과 리더가 하는 일을 듣고는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면서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금방 그 작은 부다가야 마을에는 우리 일행이 왔다는 소문이 온통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쉽게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작성한 메시지의 원고를 영어를 할 줄 아는 '티팡카'라는 현지인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그 원고를 영어와 힌두어로 번역해 주었다.
우리는 또 그 사람의 도움으로 '가야'에 갔는데 인쇄소에서 우리가 가지고 간 내용을 인쇄하고, 간판을 만드는 곳에서 커다란 천에 메시지의 내용을 페인트로 써서 현수막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우리가 할 일의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아침 10시가 되자 메인 템플의 옆에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다운타운의 광장으로 갔다. 광장의 큰 보리수나무 가지 위에 천으로 만든 메시지를 걸어서 내려뜨려 놓고 그 밑에 앉아 사람들과 미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경계하는 듯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 곳에서 우리 일행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리 곁에 가까이 오기 시작했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문은 매우 간단한 것들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였다. 메인 템플에 있던 승려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부다가야의 젊은 사람들이 그 승려들의 앞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가서 질문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젊은이들에게 붙들린 승려들이 어쩔 수 없이 우리 일행 앞으로 오게 되었고, 리더는 그들을 향해서 간단한 가르침을 말했다. 그러자 승려 중에서 하나가 말했다.
"당신이 하신 말은 이미 부처님께서 모두 했던 말이다."
그러자 리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변질이 되고 상하게 되면 독약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좋은 가르침도 이와 같은 것이다. 변질이 된 진리는 독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다고 해도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승려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젊은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리더를 가리키며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곳에 가서 물어보라고 말했다.
우리가 앉아있던 그 보리수나무 옆으로 관광객을 실은 차들이 계속해서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한 버스에서 내린 일행 중 한 여인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 여인은 자기의 미래에 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래에 자기가 성공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물었다. 그때 리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 하는 대답은 당신이 하는 일을 보고 나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리더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리더가 다시 여자에게 말했다.
"세상의 일은 하나의 공식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결정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인은 그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리더는 그 여인의 일행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다.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나에게 와서 삶은 고(苦)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있는 일을 모르고 살면 삶 속에 일은 삶을 고달프게 할 것이요, 있는 일을 알고 살면 삶 속에 일은 그 삶을 기쁘게 한다."
그러자 그 여인은 리더의 말을 듣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싶습니다."
"출마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출마를 하려면 정당에서 지명을 받아야 하는데 힘이 듭니다."
"히틀러는 처음에 지지자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지지자를 만들어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했고 당선이 되었다. 당신은 진정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당신이 왜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나에게 분명히 말해준다면 당신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을 말해 주겠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당신과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그때했던 말들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과연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안(腹案)을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떻게 지지자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 주겠다. 지금 내가 당신과 말을 하는 가운데 당신을 보면 현재의 당신의 지혜와 판단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들을 당신에게 준다면 당신이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삶이 성공할 것인지 성공하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나의 대답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괜찮겠는가?"
"예."
"운명이란 고정적인 것도 아니고 유동적인 것도 아니다. 네가 더 좋은 자신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고정된 운명 속에서 머물다가 갈 것이요, 네가 더 좋은 운명을 만든다면 너의 운명은 유동적일 것이다. 만일에 내가 지금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맞고 맞지 않는 것은 너의 행동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네가 좋은 운명을 원한다면 네 스스로 좋은 운명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부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이고, 정치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정치가가 되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