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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평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삶의 양식

편 집 부

 

 

행복과 편화는 어떻게 얻을 것인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한결같이 행복과 평화라고 선뜻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사는 것이 힘들고 그래서 단순히 자신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행복이나 평화를 말하게 되는 것 같다.

 

평화에 대해서

그렇다면 행복은 어떻게 얻을 것인가? 평화는 어떻게 얻을 것인가?

 예로부터 세상에는 많은 가르침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진리(眞理)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진리도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될 때가 있다.

도(道)나 법칙(法則)이나 약속(約束) 등은 진리(眞理)와 동일한 말이다.

어떤 법칙이나 도에 따라 진리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린다면 '진리는 길이다, 세상을 있게 하는 길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또 도덕(道德)이란 올바른 행동이 큰 덕을 쌓는다는 뜻이다.

옳은 행동, 옳은 삶도 바로 도이며 길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진리도 길이고 도도 길이고, 법칙도 어떠한 형상을 있게 하는 길이다. 약속도 같은 의미에 포함된다.

우리가 지킬 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거기에는 행복과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 행복과 평화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밝은 세상에서 밝은 마음을 지니고 살 때 진정한 평화가 마음 속에 존재하게 된다.

불행한 일이 자기에게 없을 때, 자기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그 삶은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고, 또 평화를 항상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에서 양심을 지키게 될 때, 자기의 양심을 바로 세우게 될 때 그 사람에게는 평화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을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화를 얻는 길을 잊어버린 채, 평화는 하나의 이상 속에 존재하는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고 불안하니까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평화는 바로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간과해 버리고 있다.

 

행복에 대해서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행복의 법칙은 무엇인가?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 하겠다.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어두움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조건을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조건을 만들 것인가?

첫째,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서 저축하게 되면 재물이 늘어나서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

둘째,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면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는다. 사람을 속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신임을 얻어 좋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도반, 즉 좋은 사람을 사귀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의지하고 축복을 나눈다면 외롭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셋째, 정직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근면함과 검소함과 정직함이 바로 행복을 얻는 바른 길이요, 법칙이다.

다만, 아무리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회가 있다. 진리가 무시되고 정의가 무시된 환경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뜻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진리가 무시되고 정의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도리를 다 지켜도 쉽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회가 어둡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두운 세상에서는 빛을 보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캄캄한 어두운 세상에 있게 되면 장님의 시각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어두운 세상에서는 오히려 장님이라면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적은 것이다.

 

우리의 현실  

평화와 행복은 이제 이상 속에서 존재하는 단순한 용어가 될 수 없다. 평화와 행복은 바로 자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평화나 행복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 줄 수는 없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데는 자신에게 하나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깨닫겠다고 온갖 어리석은 일들을 자행해온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란 진리에 눈뜨지 않으면 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어 있다.

어떤 일이 어떤 길에 있는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존재하게 되는지 모른다면, 우리가 바라는 목표를 이루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있는 일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삶의 중요성이며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이다.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알면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매스컴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한다. 그러나 그 토론을 들어보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최근 TV에서 '정리해고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는 것이 방영되었다.

경제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제각기 말들을 열심히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실제로는 그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말들을 계속 하고 있었다.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들을 계속하면서 각자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정리해고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일하고 싶은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나 쉽게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지금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벌이 경영하는 회사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이러한 체제나 발상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개인의 삶을 국가가 해결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통치자가 모든 개개인의 삶을 해결할 수 없고, 한 사람의 통치자에게 4천만이 넘는 국민들의 생존권 모두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이것이 중요한 일이다. 실제로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비싼 노임을 주고도 어떻게 타산이 맞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노임을 주고 타산이 맞지 않는 물건을 만들어 내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정권이 기업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정권이 오히려 재벌들에게 꼼짝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정경유착이 되고 부실경영이 생기는 것이다.

이 나라의 부실금융은 우리가 여태껏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수백조 원이 넘을 지도 모른다.

정(情)과 사랑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는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간섭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행복이 지배층의 손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 땅에는 실질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일시적인 편안함을 얻고, 일시적으로 많은 물질을 갖게 되어, 자기가 동경하던 이상을 이루게 되었을 때, 잠시나마 행복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길거리의 한 거지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불쌍해서 5천 원을 주며 음식을 사 먹으라고 했을 때 이것이 사랑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인정이며 동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잘 이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 잘못된 생각이다. 사랑이란 축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5천 원으로 음식을 대접했다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정이나 동정을 베푼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만족을 얻었다고 해서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현실

우리에게 왜 교육이 필요한가? 공학(工學) 등의 기술분야 학문은 생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그 외에 대부분의 교육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목표인,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한 것이며 인격 수양에 필요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알게 하는 교육은 세상 일에 눈을 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둡고 정의가 사라지면 그 교육도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1970년 이후에 우리 사회에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다.

누군가가 이런 기사가 해외토픽에 보도되었다는 말을 했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대학입시를 치르기 위해 새벽 5시에 가방을 들고 나가서 저녁 10시에 집에 들어온다, 세상에는 이런 나라도 있다"는 얘기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사람들을 그렇게 교실에 붙잡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라는 곳에서 학생들을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붙잡아 놓으면서도 인격완성에 필요한 공부는 가르치지도 않고 교과서에 있는 글들을 외우게 하고, 문제를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 어렵게 해서 참고서가 발행되게 하고, 또 학생들이 이를 암기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올바른 환경조성이 우리가 행복과 평화를 얻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의 환경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만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일자리를 통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좋은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검소한 생활을 통해 삶의 보람을 쌓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식자우환

우리 나라는 식자우환(識字憂患)현상이 너무 두드러진 것 같다. 최고의 지성급이라는 인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기가 막히는 말 장난만 하고 있다.

농사꾼에게 가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현실에 맞는 말을 한다. 이 종자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냉동창고에 넣어서 기온을 낮추면 겨울이 온 줄 알고 잠을 잔다. 그런 다음 꺼내서 겨울철에 온실에 심었는데 먼저 겨울잠을 잤으니까 봄이 온 줄 알고 거기에서 싹을 틔우더라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식자(識者)들은 도대체 현실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도 사회의 환경 탓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알고자 할 때는 먼저 있는 일을 살펴보고, 그 있는 일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낸 이후라야 그 일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환자가 병원에 갔는데 진찰도 하지 않고 투약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먼저 진단을 하고 그 다음에 처방을 하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문제에 대한 진단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진단을 하는 '의사'는 보이지도 않는데, 처방을 한다는 허무 맹랑한 주장만 요란하다. 오히려 옳은 말을 하는 자는 매도를 당한다. 온갖 거짓 주장을 꾸며대면 옳은 자가 하루아침에 나쁜 자로 매도되고 결국은 나쁜 사람으로 되어 버린다.

병원에 위독한 환자가 입원했는데 '너는 곧 일어날 수 있다, 용기를 가져라, 건강해라, 일어나라'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항상 확실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정확한 처방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있는 일에 눈떠라

교육의 참 목적은 사람에게 있는 일을 바로 알리고, 바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있는 일을 바로 알려면, 있는 일 속에는 항상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있는 일 속에는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있는 일에 대해서 알게 되고 눈을 뜨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만일 교육이 있는 일에 대해서 의식의 눈을 뜨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재벌 구도 밑에서 어려움에 빠져 버린 것은 바로 잘못된 교육에 그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태는 이렇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공장에서 저임금을 주어도 일을 잘 한다.

중학교만 나온 사람은 짜장면 배달도 잘 하고 야채장사도 잘 하고 리어카도 잘 끌고 농사도 잘 짓는다. 그런데 문제는 고학력자들이다. 고학력자들은 머리만 굴리려 하고 일은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살아가는데 재벌 회사가 유일한 수단이고 목표가 된다.

왜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보살필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 정부가 사회의 공정성 유지만 올바로 해주면 모든 일은 개개인이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뜻은 법칙이고 진리이고 약속이고 도이다. 우리는 이 뜻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교육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러한 뜻에 따라서 살아라 하고 가르치는 것이 옳다.

이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국가가 외침(外侵)을 당했을 때 큰 방패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을 끝없이 숭배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국민이 스스로 을지문덕이나 이순신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카네기가 강철 왕이 되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는 세계의 강철 왕이 되어서 명예와 부를 갖게 되었다" 는 것은 좋은 교훈이다. 우리는 그의 전기를 읽고 그를 동경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카네기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교육이란 이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을 카네기처럼 만드는 것을 말하며, 꿈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을지문덕이나 이순신과 같은 '맹장'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나간 몇십 년 동안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이 시대가 왜 옳은 것을 버리고 그른 것을 취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릇된 일을 멀리 해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그릇된 일을 멀리하려고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절대로 '자신을 타인에게 의존해서 살겠다'고 하는 나약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불안전하고 이 불안전한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없는 것은 사회 환경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되었으면 그 잘못된 것을 버려야 한다.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도박판에 앉게 되었다고 하자. 화투장을 들고, 몇 번 해도 잘 안되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단념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설혹 만 원을 가지고 가서 9천 원을 잃었을지라도 본전을 찾겠다고 하다가 남은 천 원까지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 천 원을 들고 일어나면서 '나는 오늘 도박판에서 천 원을 땄다. 만약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천 원마저 잃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된 곳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즉시 그 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뭔가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당연히 그 구조에서 탈피해야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판단이 서면 서슴없이 끊어버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런 결단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 국가의 행복과 평화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행복과 평화를 멀게 하고 있는 원인이다. 내가 있는 일에 눈을 뜨면 스스로 잘못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사회를 빛내고 국가를 빛내는 길이다.

 

[자연의 가르침]의 발행

우리는 요즘 '자연의 가르침'을 발간하고 있다. 서점에서는 "페이지 수는 100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책값은 왜 3,000원이나 하느냐? 다른 잡지는 150페이지라도 2,000원인데" 라는 말을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 책은 페이지는 100페이지라도 진실이 있고, 길이 있는 책이다.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우리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일을 알면서도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살다가 가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 권의 책을 만들어 내어 그 중에서 한 권이 길을 찾던 사람의 손에 들어가 밝은 길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면 그것으로서 이 일은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우리 자신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이며 더 나아가서 남을 축복하기 위해서 이다. 이 목적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땅에 거름을 주는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땅을 가꾸었을 때, 그 땅을 기름지고 좋은 땅으로 만들었을 때 그 땅은 우리에게 분명히 좋은 열매를 선사할 것이다.

우리가 남을 깨우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환경을 좋게 만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더욱 큰 축복이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고 고통스럽다 해도 그 때문에 물러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하건, 인정을 하지 않건 간에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들은 알려질 것이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며 그 삶의 목표가 우리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라는 하나의 결론을 제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 항상 현명한 판단을 하면서 활동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지혜로부터 멀어진다면, 그래서 있는 일을 잘못 보게 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처음엔 사소한 실수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실수로 변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옳고 그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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