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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인생

소년 지원병

 

 

李 三 漢

 

그 날은 내가 만 17세가 되던 날이었다.

내가 이 날을 기다려 온 것은 군대에서 모집하던 지원병의 입대 자격조건 중 나이는 만 17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6·25사변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의외로 징집을 기피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지원을 하면 입대가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내 나이가 입대조건에 맞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군대에 지원하기 위해 모병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대청동의 동광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모병소 내에는 육군 이외에도 공군과 해군도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굳이 육군에 지원을 해야 했던 이유는 공군과 해군은 육군과 다른 조건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른 조건이란 지원병에 한해서 중학교 이상의 졸업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육군에서도 지원병의 자격을 '중학교 이상의 졸업자'라고 명시하고 있었지만 졸업증명서의 첨부는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육군에 입대지원서를 낼 수가 있었다.

입대지원서를 접수하던 날 내가 알게 된 것은 지원서를 낸다고 해서 바로 입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필요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먼저 모병소에서는 나의 입대지원서를 받고 나서 접수증을 떼어 주었다. 그리고 지원병 지원자는 형식적이나마 학과시험을 치러야 하고 신체검사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예외 없이 정해준 날짜와 시간에 다른 지원자들과 같이 시험을 치르고 신체검사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리부터 걱정했던 신체검사보다도 학과시험이 더 큰 문제였다.

학과시험을 치르던 날, 나는 나에게 배부된 시험지에 적혀 있는 문제들을 보고는 암담했다. 영어와 수학과목에는 내가 읽고 알아볼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고, 상식문제 중에서 '다음 낱말의 반대말을 쓰시오'라는 문제를 보아도 생각에만 의존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반대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험지에 나온 문제인 '크다'의 반대말을 '다크'라고 적었고, '좋다'의 반대말을 '다좋'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틀 후 나는 시청 옆에 있던 제5육군병원에서 앙상하게 여윈 몸으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가슴둘레가 키의 절반이 되어야 한다 는 지원자들이 하던 말을 떠올리며 가슴둘레를 잴 때에는 1cm라도 가슴을 더 크게 하려고 억지로 배를 집어 넣고 숨을 들여 마셨다.

또 키를 잴 때에는 1cm라도 키를 줄이기 위해 온몸에 힘을 빼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몸무게를 달 때에는 1g이라도 늘리려고 먹히지 않는 물을 억지로 마시고 저울 위에 섰다.

그러나 모병소의 담벼락에 붙여진 합격자 명단에는 그 달의 지원자 중에서 내 이름만이 유일하게 빠져 있었다. 나의 첫 지원은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다음 달이 되자 다시 모병소로 찾아가서 또 지원서를 냈다. 그리고 나는 지난번과 똑같이 시험장에도 나갔고 신체검사도 받았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이번에도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받고 나오면서 빈 주머니를 털어서 최고급 담배인 아리랑 담배를 한 갑 샀다. 나는 그 담배를 가지고 조금 전에 지원자들 인솔을 끝내고 모병소 쪽으로 돌아가는 중사의 뒤를 쫓아갔다. 지원자들은 금방 제각기 흩어졌고 중사는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중사의 뒤를 한동안 따라가다가 좀 한적한 곳에 이르자 나는 중사와의 거리를 좁혀 가까이 갔다. 중사는 그때까지도 내가 그의 뒤를 따라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호주머니 속에 있던 담배를 얼른 꺼내어 중사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중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중사가 가던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중사는 두 번째 지원서를 낸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후 그 달의 지원자가 결정되던 날, 다시 모병소의 담벼락에 붙은 합격자 명단에는 많은 이름들 속에 나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군대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나는 군에 입대한다는 일 때문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에게 있던 일들을 한가지씩 정리했다.

그리고 내가 입대를 위해 떠나던 날 아침에 나는 형과 누나가 살고 있던 영도로 갔다. 나는 두 형제를 만나서, 그 날 오후에 신병훈련소로 떠나게 되었다 고 말을 했지만 누구의 입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빈말이라도 점심이나 함께 먹고 가라 는 말 정도는 듣고 싶었지만 누구도 나에게 몸조심하라 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도 있고 해서 혼자서 길을 걸었다. 아침부터 먹은 것이 없는 속은 비어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 날은 시장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발걸음이 시간에 맞추어 역으로 들어서자 역에는 이미 지원병들이 더러 나와 있었고, 지원병을 인솔하고 갈 군인들도 나와 있었다.

지원병들을 수송할 기차 주위에는 환송객들이 많았지만 나를 환송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완행열차인 수송객차는 오후 4시에 출발을 해서 밤을 새우며 철길을 달렸다. 부산에서 훈련소 인근 역인 강경역까지 열두 시간이 걸렸다.

잠을 깨우는 호루라기 소리에 눈을 떠보니 시간은 새벽 4시였다. 객차의 옆에는 군용트럭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객차에 함께 탔던 모병소의 군인들이 지원병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 호명을 하고 나더니 이상이 없자, 현지의 군인들에게 우리를 인계하고 그들은 되돌아갔다.

우리는 군인들의 지시대로 트럭에 분승했고 트럭은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다. 우리가 트럭에서 내린 곳은 대기소라고 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신병훈련소로 간다고 했다.

대기소에서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이틀쯤 후 우리는 신체검사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나자 우리는 훈련소로 이동을 했다. 훈련소에서는 제일 먼저 우리가 입고 있던 사복을 벗기고 군복을 지급했다.

소대의 내무반에는 두 사람의 조교가 훈련병인 우리를 통제했다. 조교들은 잠시도 우리를 그냥 쉬게 하지 않았다. 트집을 잡을 것이 없으면 트집거리를 만들었고 트집이 생기면 기합을 주었다. 훈련소의 기합은 여러 가지였다. 어떤 훈련병들은 기합을 받다가 참지 못해 울기도 했다.

우리 소대의 훈련병 중에서 내 나이가 가장 어렸다. 훈련소의 생활이 반쯤 끝나갈 무렵 내무반마다 비상이 걸렸다. 조교들은 무장을 한 채 대기를 했고 훈련병들은 바깥출입이 통제된 채 막사 안에만 앉아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나라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우리 훈련병들에게 해야 하는 일 한 가지를 추가시켰다. 그 일은 아침저녁마다 점호시간이 되면 그전에 없던 '혁명공약'을 복창하고 외워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훈련병들은 며칠간 복창을 하더니 암기를 잘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내 머리 속에는 그 혁명공약이 도저히 외워지지 않았다. 나의 군대생활 중에서 혁명공약을 암기해야 했던 일을 제외하면 군대는 나에게 매우 좋은 곳이었다.

나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아 왔기 때문에 군대생활이 과거의 생활에 비하면 여유가 있고 편했다는 뜻이다.

얼마 후부터 점호시간에 지적을 받은 사람이 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하면 소대원 전원이 기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점호시간만 되면 소대원들 중에 나에게 핀잔을 주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점점 날이 갈수록 소대원들은 점호시간에 내가 지적을 받게 될까봐 도리어 걱정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소대원과 조교, 그리고 점호를 하던 군인들에게 유명해졌다. 나에게는 아무리 지적을 하고 기합을 주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점호를 하던 군인들도 내 앞에 와서는 아예 지적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옷 걱정·잠자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보니 나에게는 신병훈련소가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는 곳이 되었다. 훈련소에서는 일요일이 되면 훈련병들을 면회 오는 가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일요일이 되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일요일만 되면 면회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 달을 넘긴 6주간의 신병훈련도 시간이 흐르니 자연히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 입소식을 했던 자리에서 퇴소식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이등병의 계급장을 달았고 각자 자신이 받은 병과를 따라 헤어지게 되었다.

소년 지원병들의 대부분이 기술병과였기 때문에 우리는 신병훈련이 끝나자 바로 소속병과의 기술학교로 가야 했다. 내가 2차 교육을 받기 위해 간 곳은 부산에 있던 기술학교였으며 나는 그 곳에서 다시 12주간의 병과기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기술학교는 제법 시설도 괜찮은 편이었고 식사와 잠자리 역시 훈련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았다.

나는 이 곳에서도 소대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17년간 힘든 삶을 살아온 나는 이제는 교육대 내에서 제법 발언권도 갖게 되었고 리더십도 갖게 되었다.

기술학교의 생활이 3주 정도 지나자 주말에는 외출을 신청하면 쉽게 외박도 나갈 수가 있었다. 그 날은 내가 군에 입대한 후 처음으로 외박을 나가는 날이었다. 부대에서는 외출증을 끊은 사람들을 서면까지 트럭에 태워 주었다. 그런데 트럭에서 내려서 얼마쯤 걸어갔을 때 헌병들이 길가에서 다른 군인들을 붙잡고 무엇인가 조사하고 있었다.

나를 본 헌병들이 나에게 다짜고짜로 외출증을 보자고 하더니 내가 준 외출증을 돌려주지 않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서 있게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길거리에 붙잡혀 있다가 헌병대의 트럭에 실려서 헌병대본부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붙잡혀 온 군인들이 500여 명이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여러 명의 헌병들이 붙잡혀 온 군인들을 헌병대 운동장에 정렬하게 하더니 한 사람 한 사람 지적하여 혁명공약을 외우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혁명공약을 잘 외우는 사람에게는 외출증을 돌려주고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혁명공약을 틀리게 외우거나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붙잡아 두었다.

그 날, 마지막까지 헌병대에 남게 된 사람은 나, 그리고 다른 부대에서 외출을 나왔던 한 군인뿐이었다. 헌병들은 나의 외출증을 끝까지 돌려주지 않았고, 혁명공약을 암기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헌병대에서는 내가 소속된 부대에 연락을 해서 차를 가져와서 나를 인수해 가도록 조치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부대 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3일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는 군대생활이 끝날 때까지 혁명공약을 암기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가 왜 혁명공약을 암기할 수 없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12주간의 기술학교 생활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초여름의 날씨 때문인지,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기술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의무실 출입을 자주 했다.

내가 의무실을 자주 찾아야 했던 것은 병이나 어떤 장애 때문이 아니라, 교육생들은 교육장에 앉아 있으면 졸음이 왔고 그 졸음을 해결하려고 꾀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항상 끼어 있었다.

교육을 받지 않고 내무반에서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의무대에서 끊어주는 취침권이 필요했고 그 취침권을 얻기 위해서 자주 의무실로 찾아간 것이다. 교육을 하는 교관들도 그런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속아 주었다.

그 날도 나는 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관이 환자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졸음을 참기가 어렵던 여러 명의 교육생들이 일어섰다. 그런데 그 날은 의무대에서 아무에게나 무조건 취침권을 끊어주지 않았다.

의무실 앞에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군의관이 한 사람 한 사람 진찰을 하면서 병이 없다고 판단되는 교육생은 기합을 주고 돌려보냈다. 병이 없던 나는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되돌아서기도 멋쩍은 일이었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교육생에게 너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아픈 증세들을 나에게 상세히 얘기했다.

금방 내 차례가 되었다. 군의관이 청진기를 목에 걸고 나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아프냐 고 물었다. 나는 아무리 궁리를 해보았지만 나에게는 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입맛이 없고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헛배가 부르고 힘이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했다.

사실 내가 말한 것은 조금 전에 들은 내 뒤에 섰던 교육생의 얘기를 그대로 옮겨서 한 것이다. 내 말을 듣던 군의관이 한참동안 내 모습을 관찰하더니 입원을 해야 되겠다고 나에게 입원수속을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군의관은 다른 교육생을 진찰했는데 바로 내 뒤에 섰던 교육생의 말을 듣더니 기합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 교육생이 내가 말했던 아픈 증세와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군의관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그 날부터 '만성 위장염'이라는 병명을 가진 환자가 되어서 종일을 의무실에서 생활을 했다. 점호시간이 되어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밤이나 낮이나 자고 싶으면 잤다.

의무실이라 그런지 밥을 타오는 바께스에는 항상 밥이 남았다. 나는 남는 밥 때문에 양껏 식사를 했다. 위장병 환자가 끼니마다 두 그릇씩의 밥을 먹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입원기간 중에 위장약 대신 소화제를 먹었다.

배가 부르니 마음에 근심이 사라졌고, 고달픈 일이 없어지니 몸과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는 입원기간 중에 항상 특별 대우를 받았다. 애띤 모습과 항상 명랑하고 밝은 표정인 나를 위생병들이 동생처럼 좋게 대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긴 기간을 입원해 있을 수가 있었다.

내가 퇴원을 한 것은 2주일이 지나서 였다. 부대 내에 괴질이 돌아서 입원을 해야 할 환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위생병들은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의무실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나의 의사를 듣고 나서 퇴원을 시켰다.

소대원들은 자주 나의 요령과 기지에 혀를 내둘렀고 함부로 개인적인 일로 나에게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별로 궂은 일을 맡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이라 잠자리에 들었는데 내무반장이 전등을 켜더니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작업복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몸이 너무 피로해서 그대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내 자리 밑에는 작업복 한 벌이 놓여 있었는데 내가 일어나자 소대원들이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 작업복을 입으니 바짓가랑이는 무릎에 겨우 닿았고 윗도리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다. 또 몇 군데나 천이 헤어져서 속살이 보였다.

지난밤에 내가 잠을 자고 있으니까 제일 치수가 작고 헤진 옷을 내 몫으로 남긴 것이었다. 나는 그 옷을 입으니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호들갑만 떨었다.

그 대신 소대원들과 교육장으로 출장행진을 할 때 일부러 제일 후미에 서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걸었다. 그러자 내 모습을 본 부대내의 장교가 나를 불러서 지적을 했다.

"야! 너, 그 복장이 뭐야!" 그럴 때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저는 지급된 보급품을 입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장교가 나중에 자신이 입던 미군용 작업복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렇게 해서 이틀만에 세 벌의 질 좋은 군복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점점 요령에 익숙해지면서 군대생활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교육이 끝나자 대다수의 교육생들은 전방부대인 1군으로 보내졌다. 나는 처음에는 병기지원부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몇 개월 후 다시 전선을 끼고 있는 전방사단으로 배치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소속된 부대 내에서 명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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