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인생
비운(悲運)의 삶
李 三 漢
군대 생활을 할 때는 제대만 하고 나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제대증을 받고 나서 부딪치게 된 현실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 입고 자는 일들을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거기다가 나를 더욱 난처하게 했던 일은 형의 형편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가족은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판잣집의 철거가 임박해지고 있었다. 철거 보상금이라고 나왔던 쥐꼬리만한 돈은 벌써 한푼도 남아있지 않았고 근방의 판잣집들은 철거가 한창이었다.
다급해진 형과 형수는 제대를 하고 나온 나에게 매달렸다. 형수는 당분간 자기 식구와 함께 살자고 했고 형 역시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형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좋은 곳에 맡겨서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내 일자리는 천천히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형과 형수는 그 돈으로 인근에다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이 일은 나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지고 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내가 느끼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겪는 냉정함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다. 학벌이라고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이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게 일자리는 쉽사리 얻어지지 않았다.
형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 처음 한 두 달동안 형과 형수는 내가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게끔 대해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거북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났다.
어느 날 형수가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었다. "너희 형제가 내 신세를 망쳐 놓았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며 내게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더니 형님 역시 그때쯤부터 나를 보면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형은 내가 잠을 자고 있던 방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엉뚱한 시비를 걸었다.
형은 나에게 대뜸 "병신 같은 새끼는 보기만 해도 밥맛이 없다."고 하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내 얼굴을 향해 냅다 발길질을 했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겨우 형의 발길질을 피했다.
그러자 형은 부리나케 방문 밖으로 나가더니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들어와서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형은 "이 새끼 죽이겠다."고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식칼을 내 몸 아무 곳이나 미친 듯이 찌르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방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형은 계속 나를 쫓아왔다. 나는 급한 김에 신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골목으로 뛰쳐나갔다. 형은 손에 식칼을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뒤쫓아 나왔다.
한참동안 쫓고 쫓기다가 더 이상 형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내 모습을 보니 엉망이었다. 발에서는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맨발로 뛰다가 어딘가에 부딪친 발가락은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 올랐다.
나는 쩔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인근에 살던 누나 집으로 갔다. 누나는 이른 아침에 맨발을 하고 쩔뚝거리는 나를 보게 되자 무척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왜 신발은 신지도 않고 어쩌다가 발을 다쳤냐?"하고 누나가 말했다.
누나의 말을 듣자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고 했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그냥 그리 되었어."
누나가 다시 물었다.
"싸웠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쫓겨났다."
내 말에 누나는 알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자형은 집밖에서 나와 누나가 주고받던 말을 다 듣고도 나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누나가 금방 아침상을 차려 왔다. 누나와 자형은 밥상 앞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지도 않고 있는 나에게 우선 기운부터 차려야 한다고 하면서 억지로라도 밥을 먹으라고 권했다.
아침나절이 지나서 초등 학교에 다니던 누나의 아들에게 형 집에 있던 나의 신발과 옷들을 가져오게 했다. 나는 조카가 가져온 것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무작정 누나 집을 나왔다. 누나는 한숨만 쉴 뿐 나를 붙잡지 않았다. 누나 역시 나에게 도움을 줄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가야 할 목적지도 없고, 가진 것조차 없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못난 형에게 당한 일이라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발길을 따라 큰길로 나왔지만 세상 어느 곳에도 찾아갈 곳이 없었다.
그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죽음이었다. 지난날의 일들이 끊임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에 눈물이 하염없이 두 뺨에 흘러내렸다.
정처 없이 걷는 발길이 영도다리에 가까워졌다. 나는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다리의 인도를 걸었다.
다리 난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아래로 검푸른 바닷물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다리 밑을 흐르는 검푸른 바닷물을 곁눈질하면서도 발길을 멈춰 바닷물로 뛰어내리지 못한 채 기어이 영도다리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어느새 나의 발길은 부산 역 앞에 닿아 있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기로 했다. 나는 대전까지 갈 수 있는 보통급행 승차권을 구입했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충청도 말씨를 썼고 나이는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여자는 나에게 인상이 순해 보이고 부귀할 상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내가 대꾸를 별로 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말을 걸어 왔다. 어디까지 가느냐? 장가는 갔느냐? 총각이냐? 에서부터 집은 어디며 부모님은 어떤 분이냐 하는 얘기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자 옆과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여자가 하는 질문과 내가 하는 대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열차가 대구를 지나자 그 여자는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했던 삶은 계란을 나에게 한 개 주면서 먹으라고 권했다. 여자는 계속해서 나와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 여자 덕분에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린 채 딴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열차가 대전 역에 도착할 무렵,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금방 온 몸에 추위가 느껴졌다. 역 광장에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그것은 대전 역 광장과 붙어 있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호객하는 소리였다.
역 광장의 한 쪽에는 유적지와 인근 도시들을 표시해놓은 큰 관광안내판이 서 있었다. 안내판에는 공주 부여 속리산 등 도시의 이름들과 관광지가 적혀있었다.
나는 안내판을 보면서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머물 것인가 궁리했다. 잠시 후 내가 올라 탄 버스는 공주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자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를 힘차게 달려갔다. 두 시간쯤 후 버스는 공주에 닿았다.
처음 보는 공주의 거리는 밤이어서 그런지 상점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밤거리를 걷던 나는 '여관'이라는 간판을 보자 하룻밤을 그 곳에서 묵기로 했다. 그 여관은 보기에도 썰렁했지만 나는 다른 여관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부자리가 깔려있는 아랫목만 따듯했고 다른 부분은 냉랭했다. 나는 저녁밥도 먹지 않은 채 이불 속에다 몸을 묻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갖가지 상념들이 떠오르고 내일의 일에 신경이 쓰여 금방 잠이 들지 않았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차라리 중이 되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내일은 가까운 곳에 있는 큰절에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정하고 보니 마음속의 짐을 조금은 던 것 같았다. 그제야 겨우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침 햇살이 창가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여관 마당에 있던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곧바로 여관에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투숙했던 여관은 시장과 가까웠고 근처에 버스 주차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식당들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이라 버스 주차장 옆에 한 두 집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사방이 트이고 지붕만 있는 식당이었다. 그 곳은 국밥만을 전문으로 팔고 있었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들이 없었다. 나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나서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큰절은 어딥니까?"
"갑사요. 갑사가 제일 크고 사람들도 많이 가요." 하고는 손가락으로 버스 주차장을 가리키며,
"버스는 저기서 타면 되고요, 30분마다 한 대씩 다녀요." 주인 여자는 내가 말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갑사'라는 이름을 입으로 되뇌면서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갑사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 앞에서는 호객꾼이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서 작은 시골 마을들을 하나씩 지나갔다. 그때마다 몇 사람씩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았을 때 버스는 종점인 갑사 입구에 닿았다.
정류장에서 갑사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절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었고 절까지 가는 길 중간에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과 음식점, 여관들이 있었다. 내가 경내에 들어섰을 때 그 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야 모든 시비에서 벗어나는 구나.'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마저 여의고 혼자가 되어 삶을 두고 발버둥쳐야 했던 소년시절.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만난 형의 모습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경내 여기저기를 혼자서 기웃거렸다. '승려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갑사의 주지는 어디에 기거하는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삼사십대로 보이는 승려 한 사람이 보였다.
승려는 나와 마주치자 습관처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허리를 구부리며 두 손을 모아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승려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휴양을 하고 싶은데 조용한 암자가 있습니까?"
승려는 나의 질문에 손으로 산의 정상 쪽을 가리켰다. 산은 꽤 높은 것 같았고 경사면도 가파른 것 같았다. 승려는 나에게 암자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면 등원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그곳에는 관광객들이나 일반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으니 휴양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하면서 두 시간 정도면 그곳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관심을 나타내자 승려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 절 옆 개울가까지 나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은 무척 가파르게 이어졌고 나는 숨이 턱에 차도록 열심히 위로 걸었다. 꼬박 두 시간 동안을 올라가자 산 정상에 다다랐고 승려가 가르쳐준 등원암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금방 암자의 주지를 만날 수 있었다. 주지에게 내가 잠시 머물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한 달에 쌀 두 말을 받겠다고 하면서 내가 머물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산사의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암자에는 나 이외에 다섯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다. 암자의 주지, 팔십이 넘은 노승려, 동학을 따라다니다가 산 속으로 피신해 들어왔다는 육십이 넘은 일꾼, 밥을 짓는 오십대의 여자, 열 살이 될까 말까 한 정박아 사내아이가 모두였다.
암자의 일을 하던 김 노인이 나에게 설명을 했다. 이곳에 있으면 한 여름에도 더위를 모르고 산다고 했다. 그것은 산정상의 기온이 산 아래의 기온과 10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암자에서 머문지 며칠이 지나자 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한 달간은 그런 대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산밑의 생활들에 대해 동경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동학사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갑사에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산 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일과가 되고 있었다. 어쩌다 낯선 사람들이 암자에서 머물고 가는 날이면 내 마음은 금방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여의치 않아졌다. 그것은 나의 수중에 지닌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나는 다시 부산으로 가서 형제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암자를 떠나기로 했다.
그 동안 머물던 방에서 나와 암자 입구에 이르자 부엉이들이 길바닥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부엉이 두 마리가 내가 지나가야 할 길을 가로막고 크게 울부짖으며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부엉이들은 내가 '워어 워어' 하고 쫓으며 바로 옆에까지 가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내 손이 부엉이의 깃털에 닿자 그때서야 두 마리의 부엉이는 큰 날개를 펄럭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날 나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 부산에 도착했다. 먼저 누나 집을 찾아갔더니 떠나올 때와는 달리 누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지난 두 달 동안 산에서 살았다는 것과 이제 가면 머리를 깎고 평생 중이 될 것이라고 말했더니 누나는 금방 눈시울을 붉히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난번에 내가 떠나고 나서 형이 누나에게 찾아와서 울더라고 말했다.
나는 누나의 눈물을 보자 괜스레 내 마음 한 편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에게 누나는 산에서 내려와서 잠은 누나 집의 다락에서 자고 아무 일이라도 다시 시작해보면 안되겠느냐 하며 간청을 했다.
사실상 누나나 형은 나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어느새 내 마음이 그들에게 가게 되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나는 항상 그들에게 의지하려 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내가 당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 때문이라도 미워할 수 없었던 대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누나의 간절한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결심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암자에 있던 짐들을 챙겨서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와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된 형은 지난 일에 대해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였다. 우리의 일은 이렇게 해서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형은 언제 태도를 돌변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형은 돈이 생기면 노름에 손을 댔고 돈이 떨어지면 주변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함께 사는 형수 역시 이런 형의 모습을 닮아갔다.
나는 누나 집에 있는 동안에도 형의 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날들이 많았다. 노름판에 앉아 있다가 돈을 잃게 되면 나나 누나에게 찾아와서 생떼를 썼다. 그래도 돈을 주지 않으면 시비를 걸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형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나는 형님과의 사이에서 다시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옷가지를 가방에 챙겨서 다시 어디론가 떠나기로 했다.
그 날 나는 해인사 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어둠이 깔린 후에야 종점인 해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자 여러 명의 호객꾼들이 다가왔다. 그중 한 사내가 나에게 가까이 왔다.
그는 힘을 잔뜩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좋은 여관이 있는데 가지 않겠나?"
그런데 그의 말투는 손님에게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는 삼십대 전후로 보였고, 키는 나보다 조금 작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건장한 체격이었다.
금방 다른 호객꾼들도 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은 대부분 젊은 사내들이었다. 상대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러나 나는 상대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혼자 덤빌래? 한꺼번에 덤빌래?"
나의 말에 상대는 멈칫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니들 아직 부산에 이삼한이 소문 못들었지?"
상대가 내 이름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내 말은 효과가 있었다.
나는 그날 밤 해인사 버스주차장 호객꾼들의 형님이 되었다.
나는 호객꾼들 중에서 주먹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내들에게 지난날에 있지도 않았던 나의 무용담들을 들려주었다.
나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하룻밤을 여관에서 보내고 다음날 해인사 경내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 되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내 머리 속에는 양산에 있는 통도사라는 말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