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사람들
나의 마음 속에 또 답답함을 갖게 하는 일이 생겼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또 그러했다. 점점 상식을 가지고는 살기가 힘든 일들이 생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 따위에 입을 떼는 일이 없어졌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고 자신에 대한 고통을 만들게 했다.
그런 어느날 나의 장사 터 앞의 해안도로를 복구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가 다시 한번 확인하였을 적에는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집과 옆에 붙은 한 집의 앞길만은 방치해 두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주위에는 이상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었다.
도로복구 공사를 맡게 된 하청회사 노무자들이 일을 떼 준 관청의 행동에 더 답답한 마음이 생기는지 나를 보고 관계 관청에 찾아가서 교제를 좀 해보란다.
우둔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이 나의 무능한 탓이라고 믿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며 나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항의 수해 자국이 전부 복구가 되었는데 축항도 아닌 도로부분을 2년씩이나 방치해 오다가 막상 공사를 시작한다면서도 불과 40여미터를 끊어두고 억지로 버티는 것은 무엇인가 뜻이 담긴 것도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일들 때문에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기를 모두가 좋아한다면 하고 생각을 해 보니 장래에 닥쳐 올 조국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런 일에 대하여 정부의 높은 사람들에게 탄원도 해 보았다. 회답을 받아보면 지난 행동은 나 자신을 이젠 자학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나의 운명 속에 담긴 일이라 생각하면 당장 또 신의 뜻인가, 악마의 짓인가 하는 두려움이 그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고문한다. 나는 스스로 위안을 찾기 위해 별의 별 생각도 다 찾아 보았다.
쓸데없는 짓이 많았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제5공화국이 탄생할 앞날에 기대도 걸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때는 안주 없는 술로 나의 정신을 잃게 하였다. 그런 나의 앞에 또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를 억지로 사위를 삼았고 나의 일을 위해 헌신해주던 처가의 장인이 1980년 추석을 넘긴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는 장인의 장례를 처가 식구들과 함께 치르고 보니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진실들이 나의 가슴 속에 움트고 있었다.
주위에서 좋은 사람으로 소문도 나 있었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던 장인의 행동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의지가 되어 왔는가 하는 사실을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의 가슴 한 구석이 빈 것처럼 허전해져 왔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 외로움을 느꼈고 점점 늘어가는 주량 앞에서 멍청한 사람처럼 변하여 가고 있었다. 당장 외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코는 항상 붉어져 있었고 얼굴이 타고 있었다.
아내가 나를 볼 적마다 건강에 대한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그런 소리는 한쪽 귀로 흘러 버렸다.
나는 그때 내 자신의 몸마저 주체하기가 점점 힘이 들 정도로 약해져 갔다.
엉뚱하게도 한 번 멋있게 타락해서 세상에 태어난 재미가 어떤 것인지 시험해 보고픈 느낌도 들었다. 이런 나에게 설상가상이랄까 엉뚱한 일이 또 생겼다.
친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감시인이라고 소개해야 할지 모를 사람이 나타나 나의 주위에서 그림자처럼 나를 지켰다.
K라는 사나이는 술자리에서는 술벗이 되었고 타락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밖으로 내보일 때마다 어떤 장소건 동행자가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 정치적인 문제나 앞으로 정치무대로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그는 나를 괴롭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형편 속에서 나의 무기력함을 정리하면서 어찌 되었던 영도다리 가에다 열어두고 있던 사무실을 폐쇄시키고 집으로 그 짐을 옮겼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어 버리고 혼자 집에 틀어 박힌 것이다. 이런 나의 집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K뿐이었다.
K는 우연한 기회에도 사람들을 만나면 나의 신상과 연결된 장래의 선거 문제나 나의 정계진출 문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알을 부릅떴다. 어떤 장소에서건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망치는 짓을 했고 연방 적대적으로 대해 왔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그의 행동에 그가 누구인지 몰라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이면 K는 선수를 쳤다. 상대 앞에서 이삼한이 친구라고 인사소개를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 나의 마음은 세상 덕분에 좋은 친구 하나 사귀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K의 행동에 불쾌해지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엉뚱한 생각들로 그 해의 가을이 지나가면서 나의 귓가에는 별의 별 소문이 다 전해져 왔다. 또 매스컴이라는 곳에서는 거짓말인지 정말인지 모를 새로운 화제를 전한다.
사람들은 그냥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그저 그렇겠지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옳고 그른 것은 알 바가 아닌지 알려고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고 있는 것일까.
오랜 역사 속에서 그렇게 힘들었던 대중 장치가 실현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려웠던 역사 속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오래간만에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 양 나의 마음을 안절부절 하게 했다.
신문과 텔레비젼에서는 그때부터 뉴스의 초점을 정치 규제자 대상을 두고 특종을 만들고 있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구구한 억측들을 했다.
이런 시간에 K는 아예 한낮 동안은 나의 집에서 기거하듯이 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내일의 계획을 묻는다. 나는 자꾸만 K의 행동 앞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때가 왔다고 부추겼다. 그런 순간이 생기면 나의 옆에 있던 K는 화까지 내면서 상대와 나의 대화를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의문은 K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어떤 일이 그의 사명인가?
세상의 돌아가는 상태를 볼 때 의심이 가는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도 달라지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 속에 숨긴 기대는 어처구니가 없게 된다.
내 집을 무상 출입하는 K라는 남자는 나의 의중을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무조건 나의 정계진출은 포기시키려고 애를 썼다.
주위의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격려와 지원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도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공명정대한 것에 기대를 걸게 되는가 보았다.
어떤 믿음 속에서도 불안하기만 한 나의 앞길을 두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건 그건 신경이 별로 쓰이지 않았다. 나 자신의 애정을 자신의 조국에 바칠 곳이 없음을 원통해 하고 싶었다.
그런 어느날 규제 대상에 있던 인사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가슴을 조이며 신문에 난 이름 속에서 나의 이름을 눈을 크게 뜨고 살폈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2차가 발표되어도 나의 이름은 또 없었다.
이젠 주위에서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 내가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당선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가슴 속에는 불길이 타기 시작했다.
조국을 가지기 위해 조국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면 안타까운 마음만 앞에 있었다. 오늘의 주역들이 가진 생각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과거를 경험한 나로서는 어떤 일도 상식만으로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새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했다. 허공을 날아보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리요마는 튼튼한 날개가 있는 데도 허공을 날지 못하니 당하는 자 아니면 누가 그 마음을 알까 보냐고 혼자 생각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시간과 함께 일어나는 부담이 쌓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추워지는데도 나의 체온은 열기를 내뿜었다. 또 그런 날 새로운 시대를 구하겠다는 공약처럼 브라운관의 저녁 프로에서는 선거꾼의 이야기가 방영이 되고 있었고, 물질 속에서 뛰고 있는 비정한 인간사가 마음을 아프게 화면을 만들었다.
시중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 사람들 입에서 흘러 다녔다.
정부가 제시한 시간은 선거까지 3개월이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큰 일을 빨리 서두르는지 모를 일 뿐이었다. 신문의 정치면에서는 정당 이야기가 실려 나오기 시작하였고 그런 며칠 후부터 우후죽순처럼 정당의 윤곽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음 속에는 또 고민이 쌓이기 시작한다. 조국에 대한 희망을 거느냐 내 가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나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제5공화국에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언론매체에서 더욱 요란스럽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12월 7일은 나에게는 부산시 반공연맹 대강당에서 열린 웅변대회의 대회장 직을 맡은 날이었고 K는 최근에 죽은 자기 어머니의 삼우제의 날이었다.
나는 그 날 시상식의 자리를 빼어 먹은 채 서울을 향해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눈 앞에는 나를 의심하고 원망할 주최측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차는 신나게 달렸다.
멍청한 마음 속에 기대에 찬 새로운 애정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한 가치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사명을 찾아야 한다는 기대를 잊지 않았다.
기차가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마음 속에는 흥분이 일어났다.
제5공화국은 실패가 남지 않는 동포들의 희망을 지켜줄 수 있는 정치를 탄생시켜야 한다고 하는 기대감 뿐이었다.
한스럽던 지난 날들이 생각이 났다.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핍박받던 민중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라 온 나였기에 이런 일에는 더 큰 야망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이 동포들의 앞날에 행복을 구해 줄 수만 있다면 나의 영혼은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약속은 나의 한스러운 지난 날의 경험을 바쳐 민족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행동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달려온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자 나의 마음은 또 바빠진다.
만날 사람들을 위해 교통편이 비교적 좋은 삼각동에 있는 우석호텔에다 한실로 방을 구하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통화가 된 사람들도 시기 때문인지 흥분을 하며 금방 달려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숙소인 호텔방 안은 이내 소란스러워 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나의 이런 뜻을 만류하기 위해 말을 끄집어내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끝없는 대화가 우리들에게 어떤 희망을 찾게 했다. 나는 비로소 18년 간의 지루했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이제야 나의 능력을 바칠 수 있는 시기를 만난 것이 아니냐는 착각에 빠진다. 당장 취해야 할 행동을 주위로부터 들으려고 했다.
그 시간 나의 앞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이나 능력 면에서 이 땅에 남은 인재들 중에서 우리가 빼어놓을 수 없는 필요로 해야 할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자만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부터는 새로 생기는 몇 개의 정당으로 인사를 가기로 정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른 채 의욕이 생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같은 정당에서 일을 하자고 말을 끄집어 내는 사람도 있었다. 뒤늦게 정당을 만들겠다고 발기인 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숙소의 전화벨을 울리게 하는 쪽도 있었다.
좌우간 서울은 흥청거렸고 전국에서 올라온 정치 지망생들이 불황에 허덕이던 서울의 숙박업소에다 오래간만에 호경기를 맞게 했다.
신문의 기사는 더욱 열기있게 정치 지망생들의 가슴에다가 불을 붙여 댄다. 나는 나 자신의 최종 결심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 날 정오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가칭 자유민주당의 정당결성을 포기한 선언 때문이었다. 나의 머리 속은 뜻밖의 시기에 생긴 일들에 의문점을 갖게 됐다.
나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 구구한 억측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로서는 그 사람들의 포기 사정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몸을 담을 곳을 찾아 새로 생기는 정당을 순방했다.
그런데 어제와 다른 것은 나의 조직생활 12년만에 처음 보는 일이 생긴 것이다.
정당을 만들겠다고 발기를 했던 다수 사람들은 반가워 하는데 조직문제를 담당한 실무자들이 당장 나를 대하길 부담스러워하는 인상을 주었다. 최소한 4당 정도까지가 그랬다. 나는 이런 일들이 철모르고 꺼떡대던 내 마음에 부담감을 주었다.
왜 그럴까. 이유 모를 사연에 자꾸만 마음이 꺼림칙했다. 무엇인가 나에게 잘못이 있는 모양인데 그걸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진리와 양심과 희망 때문에 나는 모순과 싸우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려던 사명적 철학이 점점 상처를 입어갔다.
세상을 보는 데도 사람마다 차이점은 있기 마련이다. 신은 아직까지 나에게 뜻을 전할 수 있는 시기를 만들게 해 주지 않는 모양이라고 느꼈다. 포기냐 참전이냐 하는 마음 속의 결단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하루 더 묵으면 하루 분의 숙박비만 손해가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씁쓸했다.
나의 상식 속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뜨겁던 가슴이 식으니까 온 마음이 허전하다고 생각이 들며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끌어다가 이런 가슴을 메워야 했다.
당장에 떠오르는 생각에는 서울에서 더 구경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서울을 빠져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도 서울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정치 지망생들로 열기가 넘치고 있었고 신문은 이런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지면을 할애했다.
나는 그런 현장에서 도망치듯 서울역을 향해 바삐 걸었다. 구좌석 형이 가방을 든 채 바쁘게 나를 따라왔다. 나는 주위를 쳐다 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부딪칠 것만 같은 사람들을 피하며 바쁜 마음이 되어 차를 타는 것마저 잊고 서울역까지 걸어왔다. 경부선 승차권을 팔고 있는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창구마다 줄을 잇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창구 앞에 가서 금방 떠나는 차표를 돈으로 바꾸려고 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서 부산까지의 차표임을 확인하고 그 차표를 대신 사주었다. 그리고는 이 순간까지 나를 도우려고 행동을 같이해 주고 있는 구좌석 형으로부터 가방을 건네 받으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기차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역전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고 있었다. 개찰을 받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간다. 구좌석 형이 먼저 입을 떼며 어서 들어가라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바쁘게 개찰구를 통과하며 열차의 좌석번호를 찾아갔다. 금방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유 모를 부아가 자꾸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도 여느 때처럼 감동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나의 머리 속에서 40년이 되어가는 나의 인생에 대해 지나온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운명은 뜻을 남기려는 나에게 실패만을 줄 것인지 앞일에 대한 궁금증이 나의 생각을 두려움 속으로 끌고 간다. 나는 견딜 수 없게 된 나의 생각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기차가 서는 역에서 소주 한 병을 샀다.
한낮의 열차 속에서 혼자서 마시는 소주의 맛은 씁쓸했지만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기에 억지로 입에다 부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속이 메슥거렸고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술기운이 나의 몸을 부대끼게 했다. 몽롱한 의식이 다행스럽게 나를 잠들게 해 버렸다.
기차가 부산에 도착을 한 시간은 오후 늦게 였다. 곧장 집으로 들어갔더니 나의 표정 속에서 아내가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자꾸만 나의 거동을 살핀다.
오나 가나 인덕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투정이 생기려는 데도 아내는 나의 무거운 표정을 밝게 하려고 어떤 확신에서인지 싱글벙글 웃음기마저 얼굴에 띄운다.
성질나는 대로라면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라고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죽이나 나한테 애가 쓰이면 저렇게까지 할까보냐 싶어 또 한 번 나 자신에 대한 순간의 외로움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며칠 동안 나는 집안에 박힌 채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괴로운 생각도 슬픈 생각도 술로 기분을 달랬다. 선거꾼들이 간간히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나의 의중을 알려고 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나에게 또 돈이 얼마쯤 준비가 되겠느냐는 것뿐이었다.
며칠 전 방영을 끝낸 드라마의 선거꾼을 본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밑천 잡아 보겠다는 꿈을 간직한 채 돈 있는 사람에게 붙기 위해 미치고 있는 꼴들이 보였다.
이런 꼴을 보아야 하는 나는 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점점 많은 양의 술이 필요했고 몸에 퍼지는 술기가 몸과 정신을 허탈상태에 빠지게 했다.
이런 나날의 같은 행동 속에서도 술로 세상사를 달래지 못해 밖으로 나오면 오가는 사람들이 내어 놓는 이야기 속에서 의외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는가 하면 조국의 앞날이 나의 마음 속에 걱정을 부채질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각 정당에서 발표한 조직책의 이름이 신문에 실려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이변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고 입을 열어야 하는가 입을 닫아야 하는가. 이제 사회에 진실을 확인할 사람이 몇이나 남아 있는지 그런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였다.
유언비어나 무고죄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읽을 때 느끼던 섬뜩함에 입을 떼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늘이 알고 있는 것, 내가 어떻게 이 시비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하루 하루가 지루했다. 시간을 보지 않고 술을 마셨다. 마음 속에는 희망을 잊은 채 허탈상태였다.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말할 상대를 찾지 못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또 봄이 왔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판에도 많았다. 나는 입가에 혼자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보기에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동정이 가기도 했다.
3월은 나의 앞에 있어서는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정치적인 어떤 대안이나 소신을 밝히지 않은 채 질서만은 잘 지켰다.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어느 때보다 선거에 대한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마음만이 생각하기에 따라 어둡고 두려웠다.
나의 코가 딸기코가 되어서 붉은 색깔을 내면서 부어 있었다. 몸을 술에 절인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주독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세상 일에 너무 신경을 쓰는 나를 두고 걱정을 하였다. 남들처럼 살면 되지 무슨 애국자가 되겠다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투정도 내놓았다.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치고 지금 한 사람이라도 출세한 사람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제는 그런 것을 나무랄 여유마저도 잊고 멍청해졌다. 허탈하게 변하는 마음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고 눈을 감지 못하는 정의감은 소리없이 혼자 울었다.
그런 어느날, 드디어 총선은 끝이 났다. 나의 마음 속에는 당락에 대해 약간 씁쓸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좋아서 뽑아 놓은 걸 가지고 또 이의를 달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속에서 시간은 또 며칠이나 흘렀다.
어느날 오후 배달된 일간신문의 지방난에는 서구 암남동 95의 18 일대의 46미터의 끊어져 방치되어 왔던 해안도로가 복구 공사를 실시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나서 1개월이 지난 다음에는 어느 건설업체가 공사를 맡았는지 깨어진 콘크리트 조각을 기중기로 들어내는가 하면 지면을 고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속에는 오랜 만에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거렸다.
세상의 모든 뜻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자신의 앞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보았다. 오래간만에 차츰 생기가 되살아 나는 것만 같았다.
여름철이 되면서 수해지역에는 다시 도로가 생겼다.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철수를 했다. 열심히 장사나 해 볼 참이었다.
나는 우리 소유의 남은 땅을 고르면서 도로와의 옹벽공사를 내손으로 처리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은 씁쓸한 데가 있었다.
관청에서 감독한 부분의 공사를 마친 자리가 어쩐지 마음에 자꾸만 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것을 두고 다음에 닥쳐 올 재난을 생각하니 마음만 고달팠던 것이다.
어떻든 나는 나의 일을 위해 빚돈을 내어 와서 공사를 시작한 것이 며칠이 지나자 옹벽공사도 끝이 나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의 날씨는 계속 더웠다. 공사를 다해놓고 살펴보니 이젠 지난번에 하던 모래장사 같은 것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엉성하게 한 도로 쪽은 옹벽공사가 지반을 제대로 조성을 못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큰 돌이 물 밑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것이 답답하였다. 태풍이 온다면 저런 것이 견딜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자꾸만 나의 마음에 의문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날 바다의 물결이 거칠어졌다. 태풍이 올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였다. 그 다음날은 바다가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파고는 점점 높아졌다. 기상대의 발표는 시간마다 달라진다. 태풍이 우리 나라의 근해를 스치며 지나간단다.
약간의 안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쩐지 바다 쪽이 안심이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 날 오후, 2년이나 걸려 완성을 시킨 도로가 힘없이 깨어지면서 새로 복구를 했던 부분들이 물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이런 과정을 보면서 기가 차기 시작했다. 잠시 나에게 머물던 안정 같은 게 금새 허물어져 버린다. 나의 손해 본 부분보다 당국에 대한 불신으로 가슴이 더 아팠다. 왜 세상은 이래도 되는 것인가? 억울한 자가 동정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 정말 나에게는 싫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또 아프게 하는 것은 수재민을 돕자는 구호였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연일 떠들어 대는 보도기관의 내용들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기막히는 사연을 말한 곳조차도 잊어버린 슬픈 감정을 술이 아니면 주체할 수 없어 나는 끝내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긴급복구라는 것을 두고 질질 몇 년을 끌어 온 것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모르지만 억지로 공사를 마치는 기분으로 끝을 낸지 며칠되지 않아 또 그 자리만 터져버리니 이번에는 수해지역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나름대로 공사자체의 불신보다 당국에 대한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파도 때문에 터진 것인가, 대비성 없는 부실에서 생긴 일인가 하는 의문들이었다.
이쯤 되니까 관계되었던 관청에서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워낙 파도가 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주위의 파괴된 부분 전부가 관에서 감독한 그 공사구간만 손실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하기만 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한테는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말할 곳도 없었다.
연거퍼 수해를 당하다 보니 지난 번에도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아예 이번에도 나와 같은 수재민을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기면 그것도 무슨 연중행사라고 학생들까지 거리에서 날뛰는 야박한 행동에는 불행한 현실에 대한 걱정만 생겼다. 그런 나에게 어떤 사람이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자발적인 행동인지 누가 모르고 시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웃의 안면이 있는 영감님은 날 찾더니 수재민을 돕겠다는 것이다. 나는 금방 눈이 크게 떠진다. 이번에는 진짜구나 생각하고 영감님이 우리가 수해 당한 것을 신문에도 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이웃의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니 반가웠다. 그래서 금방 나의 얼굴이 어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기분이 좋았는데 나중에 영감님의 본 심중을 알고는 기가 막혔다.
날보고 기부금을 내라고 억지를 썼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왜 이럴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감출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지닌 채 도대체 내가 돈을 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수재민 도와 주자고 그런단다. 그래서 돈이 거둬지면 누굴 가져다 줄 것이냐고 계속 물었다.
나에게 성금을 요구했던 영감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태풍의 피해로 파산지경에 이른 이야기와 연거푸 수해의 피해를 입었지만 지원은 고사하고 말이나마 정답게 한 번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푸념을 하니 그 사람은 도망치듯 나의 앞을 떠나갔다. 다시 나는 역시 세상이 큰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생긴다.
이러한 사실은 어디 떠들 것도 못된다. 신문에 하도 유언비어를 단속한다고 하는 기사가 자주 실리니 사실을 말해도 사실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증명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이런 것이 희극인가 비극인가 구분이 안 되었다. 나는 속이 타고 답답했다.
술로 시간을 메웠다. 자신이 자신의 육체를 박해했다. 참으로 힘드는 세상 일을 보며 산다고 느끼니 삶이란 자체가 어느 절의 중이 이야기했던 말처럼 고해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마음을 느끼고 죽을까, 나만 느끼게 되는 것일까. 나는 내 자신 앞에 있던 모든 희망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예견은 했었지만 정말 무서운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허무하고 고독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하는 슬픈 비애가 말조차 내어 놓을 곳이 없었다. 술에 의해 뱃속의 간과 창자가 시달림을 받다가 병이 되는 것 같은 데도 가만히 시간을 보낼 수 없어 또 술을 마셨다.
그런 늦은 여름의 밤이었다. 1981년 8월 14일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나의 신경을 괴롭힌다.
끊기지 않는 신호소리에 나는 힘들게 수화기를 들었다. 다급하게 전화의 저쪽에서 나를 찾는다. 나는 전화를 받고 있는 본인이 나인 것을 저쪽에다 말했다. 금방 목소리가 변하면서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한 사람은 서울에 살고 있었던 최희수 동지였다.
그가 나한테 전해준 말은 슬픈 내용이었다. 구좌석 형의 죽음을 알려 주면서 밤차로 올라오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엉망으로 마셨던 술이 금방 깨어버린 것이다. 얼떨떨하던 기분이 허탈로 변했다.
나의 급한 성질은 이럴 때 또 본색을 드러내었다. 시계를 보면서 마지막 서울행 밤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댔다.
아내를 닦달하여 여비를 구해오게 하였고 미친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왔다.
피서철이어서 그런지 역에 도착해 보니 역전에는 서울 쪽으로 올라갈 젊은 인파들로 매표소 앞이 붐비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 뒤에 붙어서 입석표 한 장이라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만 시계의 바늘에 신경을 썼다.
당일 부산을 떠나는 마지막 열차 안은 입석표를 지닌 사람들은 서 있기에도 괴롭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열기가 일어났다.
큰 덩치인 몸을 아무 곳에나 좌석표를 산 의자에 끼일 수도 없고 남의 의자 옆에 잠깐 기대어 서면 젊은이가 엉덩이를 밀어버린다. 몸이 고단해지니깐 시간은 더욱 느리게 갔다. 지루한 마음과 싸우기에는 정신도 지쳐버린다.
급한 마음 속에서는 투정이 나온다. 죽은 자를 두고 산 사람 고생시킨다고 욕을 해 놓고 비로소 웃었다.
지루한 시간 때문에 지난 15년간 그와 나 사이에서 생겼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얼마간은 감회를 느꼈다.
할 일이 많은 나를 두고 가다니, 또 누구와 사귀어 진실한 동지라 믿고 세상에 대한 꿈과 뜻을 논한단 말인가. 새삼 운명을 달리해 버린 그를 두고 아쉬움이 일어났다.
어둠 속을 뚫고 밤새 달려 온 기차가 서울 시가지를 항해 들어갔다. 나는 열차 안 세면장에서 물로 얼굴을 닦으면서도 오늘 하루 동안에 겪을 일들을 생각했다. 다행한 일은 열차에서 내리니 그 시각에 서울역의 그릴이 문을 열어두고 있어서 이용할 수가 있었다.
최희수 동지의 집에다가 내가 상경한 것을 알렸다. 최희수 동지는 곧 나오겠다며 내가 건 전화를 끊는다. 급한 대로 서울에서 알 만한 다른 동지들한테도 연락을 취해 주어야 하겠는데 8.15라는 날짜 때문에 연락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내가 구좌석 형을 위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하는 일들을 머리 속에서 찾으며 최 동지를 기다렸다. 만난지가 서로 제법된 최희수 동지는 생각보다도 빨리 반가운 얼굴로 역 그릴에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나를 자기 차에 태워 안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병원에 안치된 초라한 구좌석 형의 빈소를 찾아간 것이다.
그 집 가족들이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오열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빈소 앞에서 제단 위에 놓여진 사진을 대하자 비로소 그가 죽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고 지난날의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서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고생을 하던 그를 생각하게 되어 눈물을 흘렸다.
경주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심봉섭 형이 빈소의 호상을 보고 있었다. 우린 구좌석 형의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와 장례 문제에 대한 이야길 했다. 고인의 동생이나 자매들도 나와 심봉섭 형의 의견에 의지하려는 눈치였다.
나는 밤새도록 눈 한번 감아 보지 못한 몸이었기에 피로가 생겼다. 저녁 때가 되니 다음 날 치를 장례를 두고 장지 문제 때문에 실랑이가 일어났다.
고인의 동생들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선산 쪽에 묻자는 것이었고 또 처는 서울근교인 기독교 공원 묘지에 묻자는 의견이었다. 양쪽 다 고집이 대단하여 양보가 없었다. 또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교회목사가 와서 묘지에 관한 모든 비용은 자기네가 책임을 지겠다고까지 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이 서울 근교인 일산으로 정해졌다.
나는 고인의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고인의 동생들도 내 말을 들었다. 시간은 저녁나절이 다 되었다. 그때서야 나를 보고 사람들이 어디 가서 좀 몸을 쉬게 하라고 권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권했다.
평소 고인과 친하게 지내왔던 몇 사람의 일행은 병원의 빈소에서 유족들만 남겨두고 내일 있을 장례식을 생각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최희수 동지를 따라 천호동으로 갔다. 죽은 사람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했다. 어디서이든 나의 허전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다. 피로하던 생각들이 점점 사라진다.
참 좋은 벗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생긴다. 최희수 동지는 이런 나한테 약간의 술을 먹였다.
8월 16일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병원으로 들렀다가 어떤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구좌석 형의 죽음은 병사가 아니고 자살이었던 것이다.
병원측에서 끊어 준 진단서에서 확인을 하면서 그의 죽기 전 고통을 생각하였고 금새 숨가쁜 고통이 나한테서도 느껴졌다.
세상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젊은이의 한이 나의 가슴에 쌓였다.
왜 죽었어. 말 좀 해 봐. 아무리 물어도 나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죽음의 원인을 모르니깐 더 답답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갖가지 억측들을 하였고 그때서야 그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유족들 속에서는 분위기가 험악했다. 나는 죽은 자를 더 욕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흥분한 사람들을 타이르며 서둘러서 장례절차를 추진했다.
영구차가 서울특별시의 경계를 넘어서자 비포장 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나의 머리 속에는 지금까지 고인과의 사이에 있었던 조그마한 일까지도 떠 올랐다.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던 그가 이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자살로 끝내었다는 사실은 납득이 안 갔지만 그의 죽음에 이유가 있었다면 상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감추어지지가 않았다.
공동묘지에서는 이미 시신이 누워 있을 묘 자리를 그곳의 인부들이 미리 알고 시체의 관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두고는 우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현장을 보며 목이 메어왔다.
친구여, 동지여, 고이 자거라. 너의 최후의 비극이 슬펐더라도 나 또한 너와 닮은 곳이 있으니 조국을 위해 네 몫까지 다해 놓고 죽을 것이다. 하는 말들이 약속처럼 목에서 올라 왔다.
서울에 다녀온 나를 두고 아내는 더욱 나의 건강에 신경이 곤두서는 모양이었다. 나는 점점 삶 그 자체에 대해 허무한 것을 느꼈다.
하루하루는 세상에서 생기는 일 때문에 허탈상태에 빠지는 마음과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 속에서 염세적인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고 자신에 대한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로 하루하루가 지루하였고 현실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고 있었다. 또 다시 나의 생활은 술에 의해 위로를 받기 시작하였다. 나는 염치좋은 얼굴로 나와 함께 술을 마셔줄 사람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며 찾아다녔다.
얼굴은 수척해져 갔고 코가 점점 또 붉게 빛을 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두고 언제나 그랬듯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죽어버리기라도 했음 하는 내 마음을 알고 그러는 것일까.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일까.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억뿐인데 사람들은 왜 같은 것을 똑같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영혼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육신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는데 육신 때문에 욕망의 유혹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나는 누구인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가. 끈질겼던 생명력, 기적처럼 이이지는 사연들, 고통뿐인 운명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간직한 삶.
모든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문제에 누가 대답을 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신체적 결함을 발견하였다.
온 몸에 맥이 풀렸다. 가까운 거리를 걷는 데도 힘이 들었다. 이러다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면 무엇인가 미련이 남는다. 삶에 대한 아쉬움이 나에게 남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껴본다.
나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내과 전문의의 진단은 술 때문에 간이 많이 상했다고 겁을 준다. 입원을 하라고 권했지만 입원 수속에 따른 치료비를 생각하니 또 금방 죽을 병이 아니라고 모호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의사의 말 때문인지 술이 싫어진다. 약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간 치료제 몇 알을 사서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나의 몸에는 생기가 다시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가슴 속에 죽어가던 정의가 되살아 났고 조국에 대한 새로운 애정으로 아쉬움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또 다시 나의 사명을 찾기 위해 깊은 생각과 어떤 이론을 열심히 구상하기도 한다. 인간이 당하는 문제는 스스로 마음 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은 동포들의 앞에 나의 양심과 용기 그리고 노력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은 오늘의 정치적 현실이란 문제 때문에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땅 위에는 권력의 집단이 있었고 악이 있었고 육신의 욕망이 있어 나의 행동이 거부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이런 나를 위해 기적을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답답한 것은 나의 마음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런데도 어떠한 진리를 그 누구도 다시 내세우지 않는다.
내일의 문제를 위해 지금 죽으려는 자는 없는 것이다. 뻔한 사실을 두고 속고 속이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배운 사람들은 논리일까.
입으로 말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함부로 사실을 오도하는 이 엄청난 사실을 숨기는 데에는 어떤 자신감이라도 두고 하는 일일까. 영원히 속일 수 없는 것은 진리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장래가 염려되기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하고 동포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은 먼저 동포와 싸워야 하는 진리가 떠 오른다.
나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머리에 떠올려 본다.
괴로움과 함께 할 양심, 위험과 함께 할 정의, 굶주림 속에서 찾아야 할 외로운 용기.
나는 지금 이러한 나의 생각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다는 현실의 지루함을 느꼈다.
정말 딱한 세상만 보게 되니 눈 앞에서 자신의 고독함을 위로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나의 이론을 전하면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눈치만 남은 사람들이 옳은 말을 해도 시치미를 뗀다.
나는 이런 일을 보면서도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을 한탄만 할 수가 없었다.
양심, 자신을 괴롭히는 이 양심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니 더욱 힘들 뿐이었다. 자학과 자책이 나를 가만히 두어도 지치게 해 버린다. 이제 정말 기다려 볼 것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고독하게 살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추억을 생각했다. 고집스럽게 지킨 양심이 어떤 때는 위로가 된다.
누가 오늘의 우리를 구할 것인가. 하늘이여 축복을 주소서. 사람들이 진리를 깨우치게 도와주소서. 나는 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1981년 12월 26일 세상에 대한 실망을 느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배반만 하는 사회에서 또 한 번 당해야 하는 운명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