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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어린 두 남매는 어머니가 하던 집안 일을 꾸려 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지만 아이들한테는 어려운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곧 일어날 것 같은 어머님의 병은 점점 더 심해 갔다. 누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아홉 살이던 나도 결석을 많이 하였다. 비로소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이 깊어 고통을 참지 못해 괴롭게 몸을 떨어대는 어머니를 보면 옆에 있는 철부지의 생각에도 어머니의 병을 빨리 낫게 해야 되겠다고 걱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안 볼 때 굴뚝 뒤에 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우리 어머니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럴 때는 이전에 어머니가 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용왕님, 산신님, 조상님을 다 불러보곤 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나의 생각에는 어머니의 병이 금방 다 나아서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현실은 생각하는 반대 반향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잘 먹지 못하는 데도 배는 바가지처럼 불러왔다.

가까이서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세상을 모르고 살아 오던 어린 나까지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이라는 동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동리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먼 곳에 있는 한약방에 가서 배 아플 때 먹는 약을 지어와 먹여도 어머니의 병은 나을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가쁜 숨을 쉬었다. 이제 대소변도 우리 남매의 손으로 받아 내어야 했다. 우리는 남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다 했다.

아랫마을인 하성부락에서 제법 소문이 난 여의사도 데려왔다. (실제로는 어느 곳에서 간호원을 지냈다는, 주사 정도는 놓을 수 있는 여자였다.) 병원이 없는 산촌에서는 무당만큼이나 소문이 난 의사다.

그 여자는 나의 안내로 검은 가방에 도구를 챙겨 들고 어머니를 진찰하러 왔다. 그녀는 요상하게 생긴 물건인 청진기를 몸에 대고 진찰하는 흉내를 내었다.

얼마 후에는 가방에서 큰 주사기를 끄집어 내더니 어머니의 치마끈을 끄르게 한 후 자리에 앉히고는 우리에게 붙잡게 하여 바가지처럼 튀어나온 어머니의 배에다가 사정없이 주사바늘을 꽂아 버렸다.

주사 바늘 구멍에서는 맑은 물이 쪼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나온 물이 한 요강에 차고도 남음 직했다. 그리고는 주사 한 대를 어머니 팔뚝에 놓았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은 금방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이젠 살 것 같다고 말을 하였다. 바가지처럼 불렀던 배도 점점 가라 앉았다. 옆에서 이런 것을 지켜 보는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병이 다 나은 줄만 알았다.

그 날은 미음을 조금 먹기까지 하였지만 그것도 그 날뿐 다음날이면 어머니는 또 괴로워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배는 다시 불러오고 그전처럼 고통스러워 하였으며 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여위어만 갔다.

이즈음에 설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다른 때처럼 즐거운 마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아서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긴긴 겨울, 설날을 5일 앞둔 날이었다.

어머니는 맑은 정신이 드는 듯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죽은 할머니가 와서 자꾸 가자고 한다고 하면서 한참이나 멍청하게 우리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얼마되지 않아 몸에서는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숨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누나가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누나는 어머니의 몸 위에 쓰러져 마구 울어댔다. 나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구슬픈 울음소리는 이웃의 잠을 깨게 하였고, 한 사람 두 사람 동리 사람들이 어머니가 죽은 것을 눈치를 채고 찾아왔다.

별로 친척이 없는 우리집 일을 동리 사람들이 주관이 되어 일을 치렀다.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는 더욱 서둘러져야 했다.

제일 먼저 사람들은 부산의 형님에게 전보를 쳐 주었다. 그리고 알 만한 곳에는 부고장도 내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서 왁자지껄하였으나 나는 나이 때문인지 어머니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날 때문에 더욱 서둘러진 장례는 3일 후에는 어머니의 몸이 초라한 상여에 떠메어져서 동리 뒤의 작은 산에 묻혔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신 고아임을 느끼게 되었다.

설날이 와도 즐겁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아무도 나의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의 나이는 겨우 10살 난 어린아이였다.

날마다 서러운 일만 생겼다. 당장 나의 꼴이 초라해졌고 기가 죽어버렸다. 어떤 일을 당해도 의지해 볼 곳이 없으니 어린 마음에도 고독한 생각뿐이었다.

동리의 힘센 아이들은 아무 곳에서나 나를 동네 북처럼 차고 쥐어 박았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 친척이 없는 아이는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동리의 아낙네들조차도 내가 지나가면 저희끼리 혀를 찼다. 서럽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세월이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동물처럼 주위의 시선을 두려워 하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명절이 되어도 쓸쓸했고 이제는 영영 내 마음 속에서 즐거운 날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발길을 옮기기가 싫었다. 학교도 자주 결석을 하였다.

이제는 조그마한 꿈마저도(국민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던) 사라져 버렸다. 나의 몸이 자라서 동리에서 가장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이런 형편으로 하여 국민학교 6학년 무렵에는 더욱 학교 공부를 소홀히 했다.

봄이 가고 또 여름이 왔다. 나의 꼴은 더 초라해져 갔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것은 눈치뿐이었다. 밤이 되면 공부방이 아닌 동리의 사랑방 머슴들 속에 끼었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가을이 와도 나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조금 짓던 농사일을 위해 온종일 지게를 져야 했고 견딜 수 없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투정조차 부려 볼 곳이 없었다.

겨울이 왔다.

나는 홑바지만 걸친 몸으로 추위를 느껴야만 했다. 양말조차 신고 다니지 못하는 발은 때가 끼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손이 트고 피가 흘렀다. 어린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겨울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스스로 나의 곁에 온 겨울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방법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우리의 앞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시련의 날들이 닥쳐오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 살던 김 영감이라는 사람이 우리들한테 전갈을 보내왔다. 누나보고 꼭 건너왔다가 가라는 것이었다. 저녁나절 누나는 김 영감이 왜 우리한테 전갈을 보냈을까 의아해하면서도 그 집으로 찾아갔다.

김 영감은 누나를 자기네 방안까지 들어오게 해서는 긴 담뱃대만 빨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무척이나 거북한 표정을 지어 대었다. 입 속에서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그런 다음에야 어렵게 말을 끄집어 내었다.

우리 남매가 살고 있는 집과 밭뙈기 그리고 논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큰 인심이나 쓰는 듯 두어 달이란 기한까지 부쳤다.

누나는 영문을 몰랐다. 김 영감은 어떤 증서를 누나 앞에 내어 보였다. 그건 오빠가 부산에서 김 영감 아들한테서 돈을 가져가고 집과 전답을 양도한 양도증서였다.

누나는 오빠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동리에서는 딱한 우리를 도와 줄려는 사람은 한 집도 없었다. 당장 들리는 소문에 스물 두 살짜리 형이 노름을 해서 날렸다는 말뿐이었다.

이제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시간 한 시간 새로운 공포가 가슴을 쥐어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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