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집과 땅
세상에는 어린 나를 위안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달이라는 말미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우리 남매 앞에는 또 기막힌 일이 생겼다. 제법 인물이 괜찮은, 16살 난 누나를 동리 사람들이 외가 쪽 사람을 충동질 해서 시집을 보내기로 의견이 나왔으나 누구 하나 어린 나를 거두어 줄려는 사람은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꿈을 지니고 있던 누나는 이제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그 꿈을 잊어갔다. 신랑감이 누가 되건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앞에 닥치고 있는 운명에 따를 뿐이었다.
나는 이런 누나의 처지가 딱했다. 그런데도 누나는 또 나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남자니까 어디에 가서 밥을 얻어 먹더라도 길거리에라도 혼자 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혼자 언제이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처지는 더욱 딱해지기 시작했다.
운명과 부딪칠 엄청난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온 몸이 축 늘어진 채 외롭게 하루 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고향 땅,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고향을 생각하며 또 하루를 그냥 보내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제 슬픈 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 판에 소식이 끊긴 형을 만나보기 위해 찾아 나서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열 두 살이던 나는 언제인가 우리집을 다녀간 적이 있는 부산에 산다는 단 한 집의 친척집 주소를 누나한테 물어서 받았다.
동리의 어떤 아주머니가 부산에 볼 일을 보러 간다는 날짜에 누나는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나를 부산까지만 같이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밤에는 두 남매가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누나는 나를 생각했고, 나는 어느 집 머슴 살던 총각과 혼담이 오고 가는 누나를 생각하며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어린 남매는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서로의 눈이 부어 있었다.
누나는 더 이상 어떤 표정을 감춘 채 아침을 지어왔는데, 흰 쌀밥과 계란으로 만든 반찬까지 있었다.
누나는 자기 밥은 먹으려 하지 않고 나만 자꾸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자꾸만 목에서 넘어가지 않으려는 밥을 삼키면서 억지로 이런 일이 즐거운 것 같이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집을 나설 시간이 되었다. 누나가 준 여비 몇 푼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입고 있던 속옷의 고무줄 속에 감춘 채 부산에 간다는 옆 동리의 아주머니를 따라 마을 뒤 고개로 올라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집들이 멀어져 갔고 어머니의 무덤이 멀어져 갔다.
멀리 동리 밖에서 누나가 눈 가장자리를 수건으로 훔치고 있었다. 나도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앞에 가는 아주머니에게 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재를 넘어 가니 우리 동리는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내가 찾아 가는 신작로가 발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졌다.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앞서 가는 아주머니는 어린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사람도 너무 나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을 맞추어 온 때문인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자갈길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달려 왔다. 나는 속옷의 고무줄 속에 끼워 두었던 돈 주머니에서 여비가 될 만큼 돈을 꺼냈다. 차는 승객들을 태우고 다시 달렸다.
대부분이 시골 사람들이라 차 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차의 맨 뒷 좌석에 앉아 죄인처럼 쪼그리고 있었다. 차가 심하게 자갈길을 달릴 때마다 멀미가 생겨 어지러움을 느꼈다. 차 안은 이야기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어린 나에게는 말을 걸어오는 상대도 없었다.
차가 중간 도시의 큰 정류장에 설 때마다 먹을 것을 든 장사들이 차 안에 올라왔고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을 사서 요기를 했다.
나도 시장기를 느꼈다. 누나가 내가 집을 나올 때 차 안에서 무엇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준 것이 있지만 나는 그 돈을 끄집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위인 것 같은 장사치가 코앞에 내미는 빵과 과자가 눈 앞에 들여졌을 때에는 정말 먹고 싶었다.
입가엔 슬슬 침이 고여 들고 배 속에서는 나를 보고 사라고 재촉을 했다. 자꾸만 내어 밀며 권하는 장사 앞에서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여섯 시간이나 달린 차가 종착지인 부산의 충무동에 닿았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모두 자기가 갈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옆 동리 아주머니와 나도 헤어져야 했다.
나와 같이 왔던 아주머니는 나에게 혼자 찾아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주머니는 급히 자기가 갈 곳으로 떠나 버렸고 혼자 남게 된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속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친척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끄집어 내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주머니에도 넣지 않은 채 한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대신동이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전차길을 가리키며 따라 가면서 물으라고 일러 주었다.
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자동차가 연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길가의 2층집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구덕산 쪽으로, 전차의 레일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 가면서 자꾸자꾸 길을 확인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전차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갔다. 그곳엔 전차의 차고가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산이었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대신동이 어디냐고 다시 물으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한참 나의 행색을 확인한 후
「어느 대신동이냐, 여기도 대신동인데.」
나는 비로소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주소를 내보였다. 이 길로 따라가 어느 곳에 가서 물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갔다. 그리고 또 물었다. 얼마 묻지 않아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척집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상이었는지 모두 잘 가르쳐 주었다.
골목길을 돌아가 보니 작은 대문이 있었다. 망설이다가 대문을 두드렸다.
내 또래의 사내 아이가 나오더니 아래 위를 한참이나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상해 하는 그 사내 아이에게 나는 하동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곳의 식구들은 모두 낯설었고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맞이하였다. 마침 집 안에는 몇 년전 하동의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 형수 뻘 되는 여인이 있었다.
그 분은 나를 상상 외로 반갑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의 식구들한테도 아재라고 나의 촌수를 소개하며 내가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도시에 온 첫날 밤을 보냈다. 그 날 저녁에는 촌수로 형님 뻘 되는 그 집의 주인과도 인사를 했다.
마음씨 좋은 친척 형님은 나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동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내가 당한 모든 일을 그곳에서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선 형을 만나야겠다고 말을 끄집어 내었더니 친척 형님은 내가 찾아갈 곳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형을 찾아, 낯선 도시의 거리를 헤매며 다녔지만 형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나는 한편으로는 형이 내가 부산에 온 것을 알고 친척집에 찾아와 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나의 마음 속에서는 형을 만나야 무슨 일이든 해결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도 어린 남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형을 미워하기에는 모든 것이 어렸다.
아침나절이 되면 내 또래 동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버리고 상대해 줄 사람마저 없는 낯선 곳에서 할 일없이 혼자 길거리에서 소일했다.
나를 처음 만난 도시의 아이들은 내가 하동에서 왔다는 소문에 나만 보면 촌놈이라고 놀렸다. 그 놀림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 다른 쪽 골목의 아이들이 또 놀렸다. 촌놈 합바지, 촌놈 합바지 하며 심하게 놀릴 때는 나는 화가 났지만 점점 참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내 또래 아이들은 이런 나를 좀 모자라는 아이로 취급을 했다. 내가 그들을 쳐다만 보아도 폼을 재며 한 번 싸울 수 있겠느냐고 시비를 걸어 왔다.
이럴 때면 나보다도 더욱 애가 타는 것은 이런 것을 보는 친척집 아이였다. 이 골목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아이는 그 뿐이었다.
어느 날은 그 친척집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한 번 싸워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심하게 놀리던 골목 안의 내 나이 또래인 어떤 중학교의 1학년짜리 아이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골목 안에서 놀던 다른 애들한테까지 퍼졌다. 촌놈이 결투한다는 소리에 할 일이 없었던 옆 동리 아이들까지 관람하러 왔다.
나는 친척집 아이의 운동화를 빌려 신었다. 그리고 행여나 하며 걱정을 하는 친척집 아이와 함께 마을 뒤 공터로 올라갔다. 골목 안 아이들은 싸울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나와 상대는 서로 주먹과 발길질이 오갔다. 나와 중학생의 주먹은 막상막하를 이루었다. 이윽고 내가 부딪치면서 씨름할 때처럼 다리를 걸어 상대를 쓰러뜨리고 배를 깔고 앉았다. 친척아이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중학생의 얼굴에다 주먹을 날렸고 그의 얼굴에 코피가 흘렀다. 중학생이 불리하게 되자 골목 안 아이들이 뜯어 말렸다. 중학생은 그때서야 겁먹은 표정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골목 안의 대장이 된 기분이었다. 이때부터는 아무도 날 놀리지 않았고 골목 안 아이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하동에서 살 때처럼 나무라도 했음 좋겠는데 할 일없이 남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어린 마음에도 큰 부담을 느꼈다.
그런 어느날 형이 친척집을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싱겁게 웃었고 형도 나를 보고 웃었다. 스물 두 살된 형은 나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워 주지 않은 채 하루 저녁을 나와 같이 자고 다음날 그냥 나가 버렸다.
형이 나에게 남긴 말은 중앙동 낙원다방에 오면 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부산에 온지 한 달을 넘겼다. 가련한 나의 신세는 열 두 살짜리 답지 않게 눈치만 늘어갔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친척집은 무던히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어린 나를 당분간은 거북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그들도 생각하면 너무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친척 형님은 술만 좋아하고 생활력이 없었다. 많은 식구들은 묵장사를 하는 형수님의 함지에만 기대고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형이 어디든 있을 곳을 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형은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대신동 쪽의 골목들이 머리 속에 익숙해 갈 무렵 내 또래 할 일없는 아이들과 사귀면서 제법 먼 길인 하단까지 논고동을 잡겠다고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친척집이 지금까지 살던 집을 비워 주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 얻은 집은 대문도 없고 현관도 없는 집이었다. 가재도구를 정리하니 친척집 식구가 같이 앉아 있기에도 비좁은 방이었다.
친척 형님은 장의사에 운전기사로 다녔는데 이사 온 이후로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사무실에서 잤다. 식구들이 모두 누우면 다리를 뻗을 수 없는 방이었기에 나는 친척집 식구들의 발 밑에서 웅크리고 숨소리마저 감추면서 잤다.
친척 형님이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그동안 사귄 동리 아이들 집을 찾아 다니면서 잠자리 동냥을 하였다.
나에게는 밤중에 소변이 누고 싶으면 가장 곤란했다. 어떤 경우에는 날이 샐 때까지 참았다.
나는 나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떤 곤란한 일이 있어도 표시를 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장사가 잘 되지 않더라 면서 친척 형수님은 묵이 남은 함지박을 그대로 이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죄인처럼 마음이 쓰여 힘이 들었다.
이런 거북한 일을 보면서도 나는 도시에 나온지 3개월째 접어 들게 되었다.
나는 제법 먼 곳까지 혼자 다녔다. 중앙동까지 걸어서 형을 찾아 이 다방, 저 다방을 기웃거렸고, 사람들이 모인 길가의 이집 저집 들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엉뚱한 곳에서 형을 보았다. 형은 어떤 사람과 당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창밖의 유리를 통해 당구대만 주시했다. 붉은 공, 흰 공이 굴러 다녔다. 형은 자꾸만 상대에게 돈을 건네 주었다. 나는 창밖에서 발을 굴리며 안타까워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형은 돈이 떨어진 모양인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형을 나는 멀찍이 따라가다가 불렀다. 형은 퉁명스럽게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가 집에서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형은 그냥 며칠만 더 기다리면 데리러 갈 것이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였다.
나는 힘 없이 형과 헤어졌다. 찢어진 고무신이 자꾸만 벗겨졌다.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이런 나한테는 참기 어려운 순간이 자주 생겼고 겨울이 한참 지난 어느날, 형의 연락을 받았다.
영도에 있을 곳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형이 얻은 것이 아니었고 시골 김 영감의 아들이었던 사람이 영도에 살면서 방 한 칸을 삭월세로 얻어준 것이었다. 어쨌든 당장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대신동 친척집을 나올 때 친척집 식구들의 얼굴에서 반가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영도로 갔다. 형과 형수되는 사람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가재도구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는 이곳에서도 별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장 오늘 저녁 잠자리 동냥을 나가지 않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해만 뜨면 동리의 골목에 나와 서 있게 되었다.
양지쪽에 서 있으니까 처음 본 동리의 아이들이 슬슬 접근해 왔다. 어느 동리에서 왔느냐고 묻는 그들한테 대신동에서 왔다고 했다. 이 동리 아이들도 나한테서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촌놈대신 키다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도 아이들은 대신동 아이들보다 더욱 하는 짓이 짓궂었고 영도에는 나의 편을 드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심하게 여위고 그 대신 나이에 비해 키만 커 보인 나를 두고 동리 아이들은 당장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양지쪽 벽에 붙어 서 있는 나를 보고 앞을 가로 막으며 그늘을 지우는가 하면 폼을 잡으며 한 번 싸우자고 시비를 걸어 오는 아이들뿐이었다.
나는 옆에서 재미있어 하는 다른 관람자들을 위해 싸워야 했다.
맞지 않으려면 내가 때려야 했고, 싸움을 걸어 오던 애들의 대부분은 결국 나의 밑에 깔리게 되고 코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모나 형들한테 매를 맞았다. 차츰 나를 놀리는 아이들이 적어졌다. 이런 속에서 시간이 가니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사귀게 되었고 불행한 환경 속에서 사는 다른 동리의 아이들과도 어울렸다.
나는 언제쯤 괴로운 운명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질지 못한 형은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돈이 생기면 도박으로 날려버리고 아예 생활비를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동에 있을 때에는 지내기는 거북해도 하루 두 끼는 얻어 먹었고 어떤 날은 점심 요기도 하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하루 두 끼를 먹기가 힘들었다.
밥을 먹을 때 보다 죽을 먹을 때가 많았고 한 번도 배가 부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점점 더 여위어 갔다.
이런 형편에 나에게는 입을 옷이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열 살이나 위인 형이 입다가 못입게 된 옷을 고치지 않고 입으니 병아리에 우의 씌운 것과 같았다.
헐렁한 바지 가랑이를 몇 번이나 걷어 올렸고 허리춤은 단단하게 졸라 매어야 내려가지 않았다. 윗옷은 단추를 끼운 채 뒤집어 쓰면 몸에 자연적으로 걸쳐졌고 엎드리면 자연적으로 벗겨졌다.
누구에게선가 내가 하동에서 온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리 어린 꼬마들이 나의 우스운 꼴을 재미있으라고 합바지, 합바지하고 놀렸다.
내가 인상을 쓰면 애들이 웃어대며 더 아우성을 쳤다. 내 또래의 다른 애들도 덩달아 재미있어 하는데는 괴롭기만 했다.
동리의 덩치 큰 아이들은 일부러 다른 동리의 아이들을 불러다가 나한테 싸움을 붙인다. 그들은 단지 구경을 하기 위해 나의 괴로움을 모르는 척했다. 결국 내가 알게 되는 것은 이겨도 득이 없고 지면 손해였다.
싸우다 두들겨 맞게 된 애들의 부모는 나를 나쁜 아이라고 욕했다. 나는 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나의 딱한 처지를 도와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길거리에 싹을 내민 야생초처럼 메말라도 짓밟혀도 혼자 일어나야 하는 운명인가. 어쩌면 세상의 고통은 골고루 경험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동리의 내 또래 아이들은 딱지치기나 구슬놀이로 시간을 보내도 나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누가 그것을 잃고 따느냐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마음씨 좋은 아이한테서 개평을 얻었다. 나는 그렇게 생긴 딱지나 구슬을 소중하게 모았다.
영도의 골목들도 점차 낯이 익어갈 즈음, 개평으로 모은 구슬과 딱지를 동리의 어떤 애가 졸라서 10원에 팔았다.
길거리에서 팔던 제법 큰 풀빵 하나가 나의 호주머니 속에 있게 되었다. 정말 나는 오래간만에 돈을 가진 것이다.
나는 이 10원을 어디에다 긴요하게 써야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금방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날씨가 봄기운을 재촉하면서 따뜻해지자 나 혼자 동리에서 먼 곳까지도 나다니게 되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전차 종점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설치한 스피커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선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목적지도 정해두지 않고 그냥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신문사의 깃발을 단 짚차가 바쁘게 달리면서 호외를 뿌렸다. 그때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웅성거렸다.
나는 어느 새 남포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눈앞의 어느 건물 옆에서 나처럼 초라해 보이는 소년들이 담에 기대거나 맨 땅에 주저 앉아 있었다. 간간히 저희끼리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곤 한다.
나도 호기심 때문에서 였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들 속에 끼었다.
얼마 후 주위에서 <국제신문>이라는 신문사의 간판을 보았고 건물의 옥상에 나부끼는 신문사의 깃발을 보았다.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들려왔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듯한 젊은 사람이 육중해 보이는 나무책상 하나를 담 옆에 세웠다. 앉아 있던 아이들이 책상을 두고 밀고 밀리면서 줄을 섰다. 나도 엉겁결에 줄 속에 끼었다.
아이들마다 손에 돈을 쥐고 있었다. 나도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10원짜리 지폐를 손에 꼭 쥐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서 신문뭉치가 책상 위에 쌓였고 덩치 큰 사람이 돈을 받으면서 순서대로 신문을 넘겨 주었다. 나는 줄이 짧아지면서 나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금방 나의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