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린 노동자
큰 대문이 양쪽으로 열려 있었고 건물이 있는 담장 안의 지면에는 온통 쇠뭉치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비껴 지날 만한 통로가 건물의 양쪽으로 나 있었고 그 입구에는 사무실이 보였다. 사무실 안에는 전부 중국인 같은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 받으며 떠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내가 찾아 온 용건을 말했다. 마침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건장한 중국인 청년이 별 이야기도 없이 나를 보고 자기를 따라 오란다.
나는 그 청년이 가는 대로 뒤를 따라 갔다. 나무로 짜여진 문짝을 밖에서 밀고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꼭 굴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실내는 캄캄했고 어느 쪽 벽에도 창문은 없었다. 굴속 같은 곳의 천정에는 30촉짜리 전구 두 개가 매달려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는데 한참이나 지나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깔린 마루바닥은 사람들의 잠자리인 것 같았는데 키 큰 사람의 머리가 닿을 만큼의 공간을 두고 또 나무로 짜여진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를 보고 2층으로 된 중간 마루에 자리를 정하라고 그 청년은 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 입고 내려 오게 하였다. 나는 젊은 중국인이 시키는대로 했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의 자리라는 곳에 소지품을 놓아두고 옷을 바꾸어 입은 후 밑으로 내려왔다. 처음 이런 일을 당하고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나는 다시 젊은 중국인을 따라 공장 안으로 갔다. 굉장한 소음이 나의 귀와 눈을 놀라게 했다. 용광로의 후앙소리와 그 후앙을 돌리는 발동기 소리가 사람들의 잡담하는 소리를 여지없이 삼켜 버리고 있었다.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당장 뜨거운 열기가 몸으로 밀려 온다. 우리 동리의 옆집에 살던 중국인이 저만치 거리에서 혼자 주물의 형을 흙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곳에서 십장 일을 맡고 있는 중국인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처음 하게 된 일은 수레를 미는 일이었다. 용광로의 조개탄을 실어 나르고 쇠붙이를 실어 날랐다. 또 용광로에 들어가는 돌조각을 실어 날라야 했다. 좁은 통로를 아슬아슬 하게 수레를 밀고 다녔다.
중국인 십장의 눈은 공장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힘께나 있어 보이는 제대군인 한 사람도 나와 같은 작업인 수레를 밀고 있었다. 그 사람도 하는 일이 몸에 비해 고된지 쩔쩔매고 있었다.
나도 첫날은 긴장과 견뎌야 한다는 다짐 때문에 무사하게 넘기긴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보니 이제 열 다섯 살인 나의 체력이 감당하기에는 확실히 무리한 노동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억지로 견디게 한 것은 부식은 없으나 밥만은 양껏 먹을 수 있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조미료가 제대로 들어 가지 않은 콩나물국도 허기진 생활 속에서 살아온 나한테는 부자들의 진수성찬보다도 맛있었다.
해가 져야 고된 일은 끝이 난다. 시간이 왜 그렇게 천천히 가는지 하루를 보내면서 몇 번이나 하늘의 해를 바라 보아야 했다.
어두워진 후에야 몸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노동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몸이 뭉개지는 것 같은 피로를 느낀다.
나는 오랜 만에 허기를 잊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잠을 청하기에 또 시달려야 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아침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가려고 서둘렀다. 나는 얼굴을 닦고 어제처럼 밥 함지 속의 밥을 내손으로 먹을 만큼 떴다. 밥은 배가 부르도록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온몸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80여명의 노동자 중에서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고 보기에도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주위에서는 나의 이런 형편을 딱하게 생각한다든가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고달픈 생활을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자기 자신의 지친 몸마저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며칠이 지나니 아침마다 나의 코에서는 코피가 쏟아졌다. 흐르는 피가 몸 속에서 빠져 나간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또 감당하기 힘들어도 나는 당당하게 하루동안 장정 한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중국인 십장의 눈이 등 뒤에 따라 다녔다.
너무 일이 고되기 때문에 더 견디지 못하고 공장에서 나가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이런 중노동도 직장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업 중에 쇳물이 조금이라도 땅에 엎질러지면 일을 하던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쇳물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살갗에 닿으면 닿은 부분이 금방 타버린다. 누구나 이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쇳물에 데인 자국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몸에도 어느 사이에 쇳물 자국이 더러 생겼다. 나는 그때마다 다른 도리가 없어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월급날이 돌아온다. 조금의 돈을 생각하면 그 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형수가 기대는 곳은 나였다. 그들은 나를 돌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돌보아 왔고 조금은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형편인 줄 알았다.
형수가 아기를 낳아서 요즈음은 더 형편이 쪼들리는 모양이었다. 월급날이 아닌 데도 집안의 형편이 다급한지 형수가 나를 찾아 올 때도 있었다.
나는 첫 월급을 받는 날 군복을 물들여 놓은 작업복 한 벌을 사는 외에는 남은 돈 전부를 형수에게 건네 주었다. 나를 짐스럽게 여기던 때와는 달리 돈을 받을 때는 태도가 몹시 달라 보였다.
나의 마음 속에는 이런 일을 겪고도 미움같은 것이 없었다. 오직 하루 하루가 견디기 어려워도 바보같은 마음이 되어 어려운 일은 금방 잊고 참았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다음이면 공장 안 합숙소의 모든 노동자들이 외출을 해서 기차 굴 같은 합숙소가 사람이 없어 비게 되면 나는 그 속에 혼자 남아 있게 되는 때가 많았다.
외출은 생각조차 하기가 싫었다. 가볼 곳도 없었지만 어디를 가도 위로를 얻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 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나의 눈에도 희망 때문에 일을 하는지 굶주림 때문에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된 것을 이기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수단이었다.
나의 잠자리 건너편에 잠을 자던 어느 50대의 중국인은 하루 온종일 허리 한 번 펴는 일없이 맡긴 일에 순종하고 그 대가로 받는 적은 돈을 아편주사를 놓는 데 다 써 버린다.
그렇게 힘들여 돈을 벌고 있으면서도 그 돈으로는 아편가루를 구하는 것조차 부족하여 쩔쩔 매는 꼴을 보면 나의 마음에는 세상 일들을 알 수가 없었다.
아편 중독자가 되어버린 지 오래된 것 같은 중국인 노동자는 합숙소의 사람들이 외출을 하고 나면 혼자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한 쪽 손으로 자기의 팔뚝에다 주사기를 꽂고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때부터 눈을 감고 자리에 눕곤 하였다.
이런 일을 바로 맞은 편에서 건너다 보게 된 나는 그 영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의 계속되는 행동이 이상해 옆 자리에 있던 고참 노동자에게 물으니 아편쟁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곳에 있던 고참들은 모두 나보다 먼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말리려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또 사무실에 있던 중국 사람들도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같았다. 모두가 남의 일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은 소박하게 보이는 얼굴과 행동이 달라 곧잘 속에 없는 말을 잘 하는가 하면 기를 쓰며 자기 사정들을 숨기며 그냥 넘기려고만 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같이 있다 보면 나의 하루도 고달픔과 애환 속에서 넘어 갔다.
손수레를 밀고 있던 나를 중국인 십장은 어느날 용광로의 고지기로 지명을 하여 일자리를 바꾸어 놓았다. 옆에서 계속 들리는 후앙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당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열기였다.
덥다는 표현만으로는 말이 충분하지 않고 그냥 몸을 삶는 듯 했다. 금방 땀이 흘러 몸은 물에 빠진 것 같이 된다. 이런 열기를 사방으로 흩어 버리기 위해 사람의 몸보다 더 큰 선풍기 날개가 등 뒤에서 온종일 돌아가니 석탄가루나 쇳가루의 먼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코까지 덮는 입마개로 입을 막고 그 위를 수건으로 다시 동여 메고서 눈만 내어 놓은 채 일을 하는 것이다.
한참 일이 시작되면 조금만 게으름을 부려도 쇳물이 안 나온다고 고함이 들린다. 어려운 일은 이유가 통하지 않는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이다.
중국인이나 한국인 노동자들은 아무도 공장을 움직이는 십장의 말에 항변하지 않았다. 몸이 고달파도 공장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순종 그 자체가 방법이었다.
일이 바뀌고 부터는 자고 나면 아침에 가래가 목에서 넘어왔고 그 가래에 석탄가루와 먼지가 범벅이 되어 토해졌다. 이런 현상이 오래 가면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날이 새면 또 같은 일을 하러 가야했다.
그런 일들이 반년이나 계속되었다. 어떤 날 저녁의 일이다. 기차 굴 같은 합숙소에는 여느 때처럼 노동자들의 외출이 많았다. 나의 건너편 마루에서는 아편쟁이 중국인이 아편기운이 떨어져 괴로워 하다가 숨을 거둔 사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외출에서 돌아와 그 옆에서 잠을 잤고 아침이 되자 공장 안으로 일하러 나갔다. 그 중국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점심때가 되어서야 죽었다는 소문이 공장 안에 퍼졌다.
어느 손수레꾼이 공장 사무실에서 주는 몇 푼의 돈을 받고 아편기운이 떨어져 죽은 송장을 가마니로 싸서 손수레에 싣고 공장 문을 나갔다.
그 날의 일인데도 노동자들은 아무도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옛날 일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장 안에는 중국인 십장의 눈이 일이 시작되면 사방에서 번뜩거렸고 쉴 사이없이 일을 해야 하는 나와 같은 하급 노동자한테는 한숨조차 쉴 여유가 없었다.
그런 어느날 형수와 손위의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누가 면회를 왔다기에 공장밖에 나가 보았다. 형수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고 누나는 금방 눈물을 흘렸다.
내 가슴도 뭉클하여 눈물이 흐르려고 했으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참으며 말을 끄집어 냈다. 어떻게 왔느냐고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볼 때 꼭 내가 동물원의 짐승 꼴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올라가라고 말을 재촉하면서도 오늘 저녁에는 형님 댁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내가 먼저 공장 안을 향해 발길을 돌려 버렸다.
오후가 되자 바쁜 일에 쫓겨 잡념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일이 끝난 저녁에야 나는 온 몸을 빨래비누 조각으로 깨끗이 닦았다. 오래간만에 군복에다 물들인 새로 산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날 저녁엔 밥 대신 흑빵으로 식사가 나왔다. 나는 내 몫인 큰 빵 두 개를 종이에 싸들고 공장을 나와 형의 집으로 찾아갔다.
누나도 같이 있었다. 내가 싸온 빵 두 개를 방안의 사람들에게 내 놓았다. 사람들은 연신 말을 하면서도 빵을 뜯어 먹었다. 제법 빵이 맛있다고까지 말을 한다. 돌을 지난 조카 아이가 큰 빵을 움켜쥔다.
누나가 내게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고 다른 일을 해 보라고 권한다. 형수도 그때 공장 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런 일이면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처음으로 인간적인 말을 했다. 나는 한 달 가량 남은 음력설까지만 하고 그만 두겠다고 나의 의사를 밝혔다.
밤이 이슥해져서 합숙소로 돌아오려고 할 때까지 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은 여름보다 한결 일하기가 수월했지만 설날이 가까워 오면서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모두 명절을 쇠러 떠나면 그 사람이 다시 지옥 같은 이곳으로 돌아올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한 사람 두 사람 설이 가까워지자 공장에서 떠나갔다.
나도 음력설을 3일 남겨 둔 날, 고향에 가야겠다고 십장한테 이야기를 했다. 사무실에서 계산을 하고 돈을 찾았다.
옷 가지를 보따리에 싼 후 합숙소를 나오니 처음으로 중국인 십장이 미소를 지으면서 설 쇠고 고향에서 내려오면 공장에 다시 일하러 오라고 나를 타일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장 문을 나오는 내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걸음은 점점 공장과 멀어졌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는 굴뚝을 보면서 자신을 처음으로 대견하게 생각했다. 지난 시간 동안 용케도 참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열 여섯 살이 되는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다.
나는 당장 다음 날부터 허기를 느꼈다. 그러나 악몽같은 솥 공장의 일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월의 추위가 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일자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온종일 거리를 기웃거려야 하는 나의 몸을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춥고 배고픔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골목길 구멍가게에는 뻥과자가 아이들에게 유행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뻥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곳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구식 짚차의 핸들을 잡고 틀었다가 놓는 일이 고작이었다. 연탄불에 달구어진 틀에 쌀을 조금 넣고 틀의 뚜껑을 닫고 핸들의 밑에 장치된 곳에 집어 넣어 주면 나는 핸들을 돌려 틀을 압축시킨다. 그리고 나서 힘을 풀면 압축된 틀에서 펑하고 조그만 쌀알들이 큰 과자가 되어 튀어 나온다.
온종일 핸들을 돌리다 보면 손이 뻐근하고 몸도 피곤했지만 일할 수 있다는 사실과 조그만 돈이지만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데 만족했다.
이런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신용을 얻었다. 그래서 였는지 이집 저집에서 나를 찾아주어 나는 쉬는 날 없이 일할 수가 있었다.
하루의 해가 지는 것만으로 세월이 바뀜을 느꼈다. 슬픔도 추위도 배고픔도 잊었다.
동리의 소년들이 성냥개비라고 부르는 별명처럼 나는 거리의 어떤 소년보다도 여위어 있었고 키만 멀쩡하게 컸던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내가 지금 당장 이룰 수만 있다면 나의 소원은 한 끼에 우동 두 그릇만 먹어 볼 수 있는 형편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또 말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는데 나의 몸이 볼 품이 없어도 좋으니 살이 좀 찌게 되어 남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안다면 우스운 말들뿐이었지만 나에게 이 두 가지는 절실한 소원이었다. 어떤 때는 나의 딱한 사정을 무작정 신에게 빌었다.
도시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뻥과자가 한 때는 그렇게 유행이 되더니 사람들의 구미에서는 한물 가버려 뻥과자를 만들었던 집들이 여기 저기서 문을 닫았다.
한참 성장기에 접어든 나는 또 주위의 눈치와 허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내어야 했다. 이런 나의 사정 앞에는 상의할 곳은 물론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길거리를 쏘다니며 나를 원하는 곳이 있는가를 찾는 것뿐이었다. 온종일 행선지가 없는 발길을 재촉하며 시내의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대청동 미공보원 앞에 이르러 한낮의 강한 햇빛을 받으며 지치고 허기진 몸을 가누면서도 눈망울만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의 시야엔 어느 집 담벽에 붙어 있는 흰 종이 위의 검은 붓글씨가 들어왔다.
나는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예감처럼 종이에는 구인광고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 사원모집 광고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래간만에 찾은 구인광고를 보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 속은 잠시 어지러웠다. 부딪쳐 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밤새도록 몇 장의 종이를 버려 가면서 이력서를 썼다. 볼품없는 얼굴이었지만 빨래 비누로 때를 씻었다.
옆집의 내 또래 친구의 바지를 빌려 입고 와이셔츠는 형이 씻으려고 벗어 놓은 것을 집어 입었다.
나 자신의 이력이 아닌 구인광고의 조건에 맞추어 꾸민 이력서를 들고 대청동에 있는 조선일보 부산지사의 간판이 붙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세 살이나 올려 쓴 나이, 게다가 사실이 아닌, 고등학교의 학력 등 나로서는 양심까지 속이면서 조작한 내용들이 적힌 이력서였다. 이렇게 엉터리로 꾸며 쓴 서류도 그 쪽에서 원하는 요구에 비하면 미비점이 많았다.
당시 조선일보 부산 지사장이었던 곽도산씨는 총무 부장으로부터 서류를 받아들고 한참이나 나의 얼굴을 보더니 뜻밖에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의 떨리는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내일 아침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봉급은 당시 돈으로 일만 오천원, 그리고 잘 할 땐 수당도 준다고 했다.
나는 조선일보사의 부산지사 사무실을 나올 때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꿈일까 생시일까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날 저녁은 무슨 일 때문인지 언짢은 표정이던 형수에게 취직이 되었다는 말과 일만 오천원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주었더니 그도 얼굴을 활짝 피우며 정말이냐고 따진다.
내가 회사에 취직되기까지 경과를 이야기하자 당장 출근하려면 옷이 있어야 할 텐데 하고 걱정을 해 준다. 그 날 저녁 나는 중국인의 솥 공장에서 일할 때 산 군복을 물들인 옷을 손질해 입고 다음날 출근을 했다.
처음 내가 맡은 일은 신문 배달원의 배달감독과 애독자 구독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구 쪽 지역의 총무직책을 맡았으며 당장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배달원을 따라 다니며 한 집씩 나의 구역 내의 독자 집을 확인하고 머리 속에다가 집어 넣어야 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같은 일을 하던 사원 중에 나이가 가장 어렸다. 실제로는 배달원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애들이 반이나 넘었다.
나는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남들보다 애를 써서 일했다. 밤이면 천자문 책을 사다 놓고 한문 익히기에 열중하기도 했다.
내가 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2개월이 채 못되어 여러 사람들한테서 특히 그곳 지사장으로부터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더 먹은 고등학교 3학년인 배달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미수금 독촉을 하였고 새로운 신문 구독자 확장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니 지사 내에서 구역별 수금 및 확장 부수에 1위를 하였다. 지사장은 나를 새롭게 신임해 주었다. 나는 신문사에서 하는 업무에 대한 일에 더욱 익숙해졌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동료 직원들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준다.
나는 매일매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도박이 심하고 가정을 돌볼 줄 모르는 형이 종종 사무실 앞에 찾아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월급을 받으면 집에 보내 주는 데도 형의 요구는 잦아졌다. 어떤 날은 배달원이 수금해 온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고 어린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다가 요구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막말을 하고 욕설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나는 형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불쌍한 형, 나는 이런 형 때문에 몇 달이 지나도 옷 한 벌 사 입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분주했다.
4월이 되면서 연일 학생들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내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경쟁이나 하듯 길거리를 메우며 데모를 했다. 신문은 이런 사실을 과장하여 보도하고 흥분한 시민들이 데모대에 박수를 치고 연일 아우성이다.
그러니까 4·19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시내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무장한 군인을 거리마다 길목에서 보게 됐다. 사람들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의 오기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킨 나날 속에서 거리엔 담화문이 나붙었지만 사람들은 보지도 않았다.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네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지도 않은 채 남이 하니깐 나도 외친다는 식의 데모대의 숫자는 불어 났고 흥분은 봄철에 열기를 더해 갔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자리를 물러 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냈다. 경무대를 나서는 사진이 신문을 통해 온 사회에 전해졌고 하루 아침에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몰락했다.
세상의 인심이 또 바뀐다. 그동안 자유당 정권 밑에서 그 정책에 반대하던 글을 실었던 탓으로 폐간되었던 경향신문이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복간된 것이다.
천주교 재단에서 발행하던 경향신문이 새로 복간됨에 따라 전국에는 새로운 조직과 보급망이 형성되었고 조선일보 지사장이었던 곽도산씨는 경향신문 부산 지사를 다시 인수했다.
조선일보는 다른 지사장 앞으로 넘어갔다. 영업 사원들의 반은 경향신문으로 반은 조선일보로 갈라졌다. 나는 곽도산씨가 짜 놓은 인사계획에 의하여 경향신문으로 갔다.
대청동에 있던 조선일보의 간판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바로 같은 자리에 경향신문의 간판이 나붙었다. 내가 이곳에서 새로 맞게 된 구역은 초량을 중심으로 한 동구 쪽이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다른 곳보다 많은 애독자를 확보하였고 운영도 잘해 나갔다. 나보다 나이가 더 먹은 배달원들과도 순조롭게 일들을 처리해 나갔고 구역에 대한 활동도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런 몇 달 후였다. 내가 관리하던 지역이 지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지국에서는 인수 인계를 해 갔다. 이제 나는 지사 내에서 내근 근무를 하면서 부실한 지국을 인수하고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나는 요령을 피우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직 지시된 사항에만 의지하였고 그러니까 문제를 생기게 하지 않았다.
신문에 대한 경험과 보급 과정의 관리에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몇 개월이 못가서 손해를 입게 되었고 지국을 지사로 넘겨왔다. 참으로 내게는 바쁘게 된 한 해였다.
이제 나는 열 일곱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초량 지국장이 나를 찾아왔다. 나를 보고 일을 좀 돌보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지사장에게도 매달린 모양이었다. 지사장은 곤란한지 나에게 의향을 물어 보라고 하며 모든 것을 나에게 미루었다.
지국장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지사장이 승낙하였으니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통사정이었다.
세상의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이럴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만 지국장의 요청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지국장의 말에 따라 지국장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한 달이 지나니 약속은 이행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국장의 말에 속아 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곳을 떠나오려고 해도 지국장의 처남인 당시 초량 바닥에서 제법 악돌이로 소문 나 있었던 27세 가량의 제대군인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두 달 동안이나 그들에게 억눌려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그곳을 빠져 나오기 위해 요령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신통하지 못하니깐 지국장은 슬그머니 나를 놓아 주면서 끝까지 엄포를 놓았다.
부산에는 봄이 서서히 오고 있었다. 나는 당장 실업자가 되어 직장을 구해야 했다.
영도로 이사와 살고 있는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누나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나의 사정 이야기를 하고 며칠만 쉬겠다고 나의 뜻을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누이의 손에다 지니고 있던 돈 얼마를 건네 주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할일 없이 거리로 쏘다녔다. 나 자신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느 오후였다.
대청동에 있었던 경남지역 병사구사령부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담벽에 부쳐둔 신병 모집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벽 쪽으로 걸어갔다. 한 자씩 벽면의 글을 읽어 가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군대나 지원할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장 나의 발길은 앞에 있는 대서소에 들어가서 3군 지원병 모집 절차와 구비서류를 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