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배달원
나의 머리 속에는 금방 신문을 돌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빨리 신문을 돌리는 배달원이 되고 싶었다.
나의 마음은 겨울철인데도 열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형수가 집에 돌아온 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나는 무엇인가 마음 속에서 금방 죄인처럼 자신이 위축됨을 느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형수 앞에서 신문배달원 모집광고를 본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의 심중은 절대 공짜 밥은 안 먹을 겁니다 하는 감정이었다.
형수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형수가 희멀건 강냉이 가루 죽 한 그릇을 반찬도 없이 방으로 들여왔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애를 써서 구비서류를 갖추어 신문사에 가져다 주었다. 곧 통보하겠다는 그 쪽 사람들의 말을 믿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하루 겨울의 추위를 골목의 양지쪽에 서서 소식 오기만을 기다렸다.
학생들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난 어느날 그렇게 기다리던 배달원의 자리에 대한 신문사의 통보가 왔다.
나는 신문사로 달려갔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 줄 전임 배달원을 신문사에서 소개받고 다음 날에는 전임 배달원의 안내로 독자 집을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한아름의 신문을 허리에 껴안은 채 전임 배달원을 따라 한 집 한 집 신문을 넣으며 나의 배달구역이 될 독자들의 집을 익혀갔다.
첫날은 배달이 끝나고 보니 3시간이나 걸렸다. 동광동 5가에서 영주동 수원지 위까지 골목마다 돌아야 했다. 새벽마다 반복되는 인수인계가 3일만에 끝이 났다.
전임 배달원이 얼굴에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잘 해봐!」
하면서 나를 격려하는 말을 해주었다.
「... 응 고마워.」
하는 말로 대답을 하며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전임 배달원 소년과 작별의 악수를 했다.
이젠 정말 나는 배달원이 되어 이른 새벽,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한아름의 신문을 허리에 껴안은 채, 한 집씩 독자 집을 찾으며 뛰어다녔다.
날이 갈수록 배달을 하는 일은 익숙해졌고 추위도 봄기운에 쫓겨 누그러졌다.
신문은 서울에서 기차로 밤에 실려와 새벽 5시쯤에 도착되어 왔기에 통금만 해제되면 나는 배달을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에 시계가 없었던 형편이라 언제나 통금해제 싸이렌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싸이렌 소리를 놓쳤다가는 독자들한테 투정을 받기가 일쑤였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어린 나는 시간을 어림잡을 줄 몰라 잠자리에 들어도 선잠조차도 청하지를 못했다.
오직 신경은 잠결에서도 싸이렌 소리를 듣기 위해 곤두서 있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면 자정이 새벽으로 착각될 때도 있고 새벽이 자정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잠 속에 빠져 있던 나는 싸이렌 소리만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사방은 어두웠고, 그믐날이 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 어느 날이다. 나는 싸이렌 소리만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낯이 익은 어두운 길을 늦을세라 달음박질을 쳤다. 골목을 나설 때만 해도 총총히 걷는 골목길의 사람을 보았다. 나는 늦은 것만 같은 마음으로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거리는 점점 죽음처럼 고요해져 갔다. 영도다리를 넘으려는 찰나에 누가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이리와 봐.」
나는 그때까지 경찰서의 순경 아저씨가 왜 나를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너 지금 어디 가니?」
가까워진 거리에서 순경이 말했다.
「신문 돌리러 가요.」
라고 대답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도 순경은 다시 불렀다.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몇 신데 신문을 돌리러 가냐?」
나는 순경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이렌 소리를 듣고 나온 거예요.」
싸이렌 소리란 나의 말에 순경은 무언가 알아 채고는 12시 30분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자정을 새벽이라고 착각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말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경찰서 정문 근무의 순경도 씩 웃었다.
나는 새벽까지 정문초소의 나무의자에서 졸며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새벽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에 비로소 신문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수십 명의 배달원 중에서 일착을 하였고,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신문사의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의 난로 가에서 몸을 녹일 수가 있었다.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신문배달도 익숙해져 갔다. 신문사의 상급 직원들로부터 착실하다는 평도 자주 듣게 되었다.
신문배달을 시작한 지도 1개월을 넘어섰다. 이제 나는 배달료를 받을 날이 온 것이다. 흐뭇한 마음에 돈을 받으면 쓸 곳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그 날 오후부터 당황하게 되었다. 나의 상급직원인 배달직 감독은 미수금 영수증에서도 돈이 잘 걷히지 않는 영수증 중에서 배달료만큼 받아서 가지라고 뜯어 주었다.
나의 마음은 지금까지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가져 오기를 집에서는 기다리고 있는데 단돈 얼마라도 돈이 생겼음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맥빠진 발걸음으로 영수증을 지닌 채 급한 생각에 구독료가 밀려 있는 독자 집으로 찾아 나섰다. 독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며칠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리 뛰어다녀도 그 날은 한 집도 수금을 못한 채 힘없는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맥이 빠져 있는 나를 본 형수는 의심하는 눈치였고, 무능력했던 형은 어떤 마음에서인지 욕설을 섞어가며 다 집어치우라고 화를 냈다.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처럼 민망스런 마음에 어떻게든 그 순간을 넘기고 싶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이런 순간에 나를 더욱 기죽게 했다. 떨어진 고무신에서는 물기가 올라오는 데도 나는 신발 하나 바꿀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의 입장은 집안에서도 대우가 더욱 나빠졌다. 죽그릇이 바뀐 것이다. 양재기에 담겨져 있던 것은 대접으로 바뀌었다.
나는 하루하루 더욱 심하게 허기를 느꼈다. 몸은 크려고 바둥대는데 속을 채우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갔다. 언제나 반복되며 생기는 딱한 일 속에서도 살아야 되겠다는 희망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밤이 이슥해지는데 얼마의 미수금을 받겠다고 나는 영주동 일대를 쏘다녀야 했다. 화교 골목의 어떤 국밥집에도 두 달치의 구독료가 밀려 있는 집이 있었다. 상점의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저녁 9시를 가리켰다.
나는 국밥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구수한 돼지고기 삶은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연방 군침이 입 안에 가득 고였다.
신문대금 받으러 왔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음식있는 곳과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식당주인은 다음에 오라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나는 온몸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한 달치라도 좀 떼어 달라고 다시 매달렸다.
주인은 이런 내 앞에서 화를 내며 나를 몰아 세웠다. 나는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런 나를 두고 식당주인은 더욱 기세를 더하며 윽박질러 왔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가 딱했던지 오늘은 돌아가고 다음에 와서 달라면 될 것이 아니냐고, 모두 나의 사정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를 타일렀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지 않았다. 나의 뺨 위에는 눈물이 흘렀다. 이런 나를 보고 식당의 주인 남자는 더욱 기세를 높여서 상말까지 했다. 나는 항변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어떤 손님이 나를 자기네 자리에 앉히고는 어른의 말을 그렇게 안 들을 수 있느냐고 타일렀다. 식당 주인도 모두가 나를 타이르자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지 잠잠해졌다.
나는 아무래도 나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어린 나이에 신문배달원이 된 나의 사정이야기를 했다.
나는 식당 주인이 나의 말을 가로 막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 영수증이 나의 월급이라는 점과 어쩌면 내일은 온종일 굶게 될 것이라는 딱한 내 형편을 털어놓으니까 주위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렇게 안 좋게만 보던 주인은 내일은 꼭 주마고 여러 사람 앞에서 약속을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무척 측은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다. 정말로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발길을 돌려 식당을 나오는 나의 마음 속에는 세상의 인정이 생각했던 것만큼 험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도 많은 날들을 굶다보니 몇 끼 정도는 굶어도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원하고 찾게 되는 본능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날마다 여전히 신문이 도착하면 한아름이나 되는 신문을 안고는 같은 길을 뛰어 다녔다. 어떤 날은 신문을 실은 기차가 연착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배달원들은 애를 먹게 된다.
신문을 집어 넣으면, 신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대부분 투정을 해댄다. 어떤 사람은 쫓아 나와서 '구문'을 넣을테면 당장 끊으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예 신문을 안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여 급한 나의 발길을 붙들어 두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모든 일이 투정부리는 독자 앞에서는 꼭 내 잘못인 양 송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세상의 인심이 나같은 소년을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힘드는 일은 하루하루 더 많이 생기고 고역은 늘어갔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땀 투성이의 몸이 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영주동 수원지 위쪽을 돌 때에는 언제나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게 된다.
어느 날 아침에 생긴 일이다. 기차가 좀 늦게 도착을 했다. 나는 힘들게 한 집 한 집 신문을 넣고 있었다. 영주동 수원지 위쪽을 올라왔을 때에는 아침 햇살이 온누리를 비추었고 태양은 제법 하늘 가장자리까지 떠올라 있었다.
신문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나를 부르며 신문을 넣지 말라고 성화들이다. 나는 기차가 연착이었다고 변명을 하면서 다음 집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땅과 하늘이 빙빙 돌았다. 머리 속이 어지러워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중심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내 꼴이 어린 마음에도 쑥스러워졌다. 주위에 흩어진 신문을 챙겨 들고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피해 힘껏 뛰어갔다.
14살의 한 해를 신문배달로 날들을 채우고 보니 영양실조 속에서도 자란 키가 그 동안의 경험과 함께 이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동아일보 부산분실내에서 배달지역이 좋지 않기로 소문 난 구역을 일 년만에, 내가 처음 신문사로 자청해 찾아갔던 때처럼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정이 딱한 소년에게 독자 집을 한 집씩 한 집씩 인계를 하였다.
나보다도 두세 살 위인 것 같은 소년은 내가 처음 배달을 시작할 때처럼 의욕을 가지고 인수를 받는다. 3일간 나는 그 소년과 같이 다니면서 배달 길을 상세히 일러주고 복잡한 길목에서는 그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하게 하였다.
나는 그 소년에게 마지막 날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니 미소를 지으면서 기대감에 넘치는 표정을 보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해방감에서 맛보는 시원함을 느끼며 그 소년과 헤어졌다.
고향을 떠나와 낯선 도시에서 어린 나이에 삶을 위해 싸워 온 세월도 3년이 되었다.
형이 입다가 물려주는 옷이 이즈음에 와서는 바지가랑이나 소매를 걷지 않아도 되었다. 품은 우의처럼 느껴졌지만 행동하기에는 옛날보다 수월했다. 나는 빨리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생각을 자주 하였다.
오가는 사람을 볼 적이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체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 했다.
검게 탄 얼굴에 지게를 진 사람을 볼 적에도, 길거리에 늘어 선 무허가 우동집의 포장을 부담없는 표정으로 젖히며 들어서는 것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나도 언제쯤이면 저런 곳을 끼니 때마다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한 끼니에 막국수 두 그릇만 먹을 수 있는 것이 당장 나의 소원이었다. 나에게 다른 소원이 있다면 아무 일이라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해낼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별다른 기대나 희망을 가져 볼 곳이 없었던 나는 아무리 깊게 생각하여도 의지할 곳은 자신 뿐인 것이다.
고통스럽고 고달파도 세월은 나를 성장시켜 주고, 나이를 먹게 해 준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었다.
오직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 흐르는 것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겨울이 지난 바닷가의 풍경은 한가로웠다. 신문 배달을 그만 두고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다시 한적한 바닷가를 찾았다.
전에 다녀본 길이라 낯이 익은 산비탈을 수월하게 넘었으며 가파른 벼랑에서조차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정감을 느꼈다.
작은 파도가 바위 끝에 와서 부딪히면서 흰 물결을 퉁긴다. 그리고 그 물결은 금방 푸른 바다로 다시 잠겨 버린다.
물기 젖은 바위에는 돌김이 탐스럽게 붙어 있었다. 겨울 내내 자라서 그런지 제법 물결이 스칠 때마다 나래를 폈다가. 물이 빠지면 바위에 붙어버린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돌에 붙은 돌김을 뜯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뜯어 모으는 김의 양도 많아졌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까 물 속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가 없어 여러 종류의 해물을 채취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팔을 걷고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뜯어내었다.
한움큼의 김을 입 속에 넣고 씹어본다. 별달리 맛은 없지만 시장기를 느끼는 나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몇 시간의 작업을 통하여 얻은 것들이 제법 쌓여졌다. 아침에 나올 때 집에서 가지고 나온 보자기에 싸니 제법 묵직하다.
다음 날도 나는 바다 쪽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는 외로운 마음이 들지만 형수의 푸념이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이렇게 나다니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날씨는 매일 따스하게 변해갔다.
물가에 다니면서도 마음은 빨리 날씨가 좀 더 따뜻해져서 물 속에 마음껏 들어가서 필요한 것들을 더 많이 따내고 싶었다.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다로 나갔다. 살결이 검붉게 타 들어 갔지만 나는 내 모습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은 이런 나의 처지를 아는지 몸도 별 아픈 곳 없이 세월이 흘러 가주었다.
동리 사람들은 추한 꼴을 한 내가 또래의 자기 자식들과 어울리는 것마저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도 단 한 집 이웃에 살았던 중국인의 부인이었던 일본 태생의 여인이 동리 사람 중 나에게 가장 호의를 가져주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동리 사람들과는 어울리는 일이 없었다. 그 집의 어린 아이도 언제나 이방인답게 부모하고만 논다.
나는 이웃인 그 집 아이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어울렸고 또 그를 업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이의 어머니되는 일본 여인이 어느날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솥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여인은 솥 공장에 가면 밥은 양껏 먹을 수 있다는 소리를 했다. 나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는 말에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이니 마음으로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귀띔을 해 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일본여인이 나를 부르더니 이야기가 되었으니 공장에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나는 헌 옷 한 벌을 챙겨 중국인들의 주물공장(鑄物工場)이 있는 대평동의 쌍화주물이라는 솥 공장을 찾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