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正道)와 사도(邪道)
세상에서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에 대한 시비는 끊이지 않고, 종교로 인한 폐해는 심각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도와 사도를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세상에서는 많은 세월동안 정도와 사도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아직도 이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정도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정도라 한다.
사도는 사실을 숨기는 것을 사도라 한다.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일의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정도의 길이다. 길흉화복의 모든 원인은 있는 일 속에 있는 것이며, 있는 일을 바로 아는 것은 자기와 세상을 축복하는 길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있는 일을 숨기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 채 거짓을 퍼뜨리고 거짓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집어넣어서 사람을 잘못되게 하고, 세상을 잘못되게 하는 일들을 사도라고 정의를 할 수가 있다.
사람이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갈 수는 없다. 자기라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갈 사람은 방향을 동쪽으로 잡아야 동쪽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서쪽으로 갈 사람은 서쪽으로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자리에서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있는 일을 알고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잘못된 사람들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있는 일을 듣고 자기 속에 받아들일 수 있으며 볼 수 있게 된다.
일정한 용기에 쓰레기를 가득 채워놓고 나서 거기에 다른 것을 더 넣으려 하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속에서 말만 가지고 남을 속이게 되면, 그것은 자신을 그르치게 되고 또한 남을 그르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일은 내 탓이요."라는 말을 한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내 탓일 때도 있고 내 탓이 아닐 때도 있다.
내가 원인을 제공했을 때는 그건 내 탓이 되지만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 때는 내 탓이 아니라 내가 피해자이고 억울하게 당하게 된 것이다.
내 탓이요 하는 말은 나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 왔던 말이다.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밝히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밝혔다가는 자기의 잘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가르침 또한 애매 모호한 것이다.
하나의 원인을 만든 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가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곳에 사람들이 가게 되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신을 조심하라. 영적 접촉을 경계하라 고 하는데, 신·잡귀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어디에 가장 많이 붙느냐하면 거짓말 잘하는 사람들에게 붙게 된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의지가 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잡귀들이 의지가 나약한 사람에게 잘 붙는 것이다. 그래서 나약한 사람들을 귀신이 움직이게 된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점은, 정도를 따르던 사람이 어떤 나쁜 인연으로 인해서 자기를 망치고 사도로 가는 일은 흔히 있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도를 따르던 사람이 좋아져서 정도로 돌아서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의식은 수만 개의 자기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이 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정도를 가던 사람이 사도로 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사도 쪽에 있던 사람이 정도 쪽으로 오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로 인해서 팔이나 다리를 잃고 불구자가 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한번 불구자가 된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어떤 사람이 이상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해서 효험을 봤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귀신의 장난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행한 어리석은 일·기도를 통해서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을 있게 하는 것은 참으로 큰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장님은 막대기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장애물에 부딪치고 넘어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의식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일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존재한다. 이 법칙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생기게 되는 일들이 있다.
우리 속에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는 불행을 우리 스스로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축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들은 귀신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세계에 자신들이 만든 신의 우월성을 내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에게 예속되게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귀신을 앞세워서 사도를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얼마나 무섭고 불행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만일 남(귀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의 결실,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남의 삶을 살았는데 어떻게 자기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나 말하는 평범한 진리는, '살아서 편안한 사람은 죽어서도 편하다' '살아서 좋은 사람은 죽어서도 좋다'고 말한다. 정도를 배우고 정도를 알고자 한다면 자기 속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확고한 결심이 섰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독약이나 마약을 먹으면 당장 효험이 나타난다. 그런데 보약은 먹어도 당장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독약을 가진 사람은 약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다. 우선 이 약을 먹어보고, 좋으면 좋다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럴 듯한 말이다. 그래서 주는 약을 먹었더니 그만 죽게 된 것이다. 나쁜 사람이 사람 하나 굴복시키기는 간단한 것이다.
생소한 사람이 약을 준다고 하면 먼저 단단히 확인을 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좋은 약이라면 당신이나 당신 가족에게 먼저 먹여 보라. 나는 정말 좋은 약인지 확인하고 나서 나중에 먹겠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왜 나에게 주려고 하는지 설명해라."
그렇지 않고 그냥 그 약을 받아먹는다면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것이다. 마약은 한번 먹으면 자꾸 당기게 된다. 그래서 계속해서 먹게 되면 마약의 노예가 되어 폐인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을 권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큰소리를 치고 싸우기까지 해야 겨우 도와 줄 수 있는데, 나쁜 것은 조용히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한번 먹어보고 결정하라."
정도는 항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다.
예수는 진리를 말하고, 사람들을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살인을 한 바라바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잘못된 사람을 구하고 죄 없는 예수를 죽인 것이다.
이것이 역사 속에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역사는 시기와 암투 그리고 음모와 억눌림 속에서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에는 천국이 존재할 수 없었다.
삶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역사책을 읽어보라고 하는 말은, 그 역사 속에 인간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 세상 속에 있던 뜻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인간의 정신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멸망하지 않는 한, 그 인류에게 종말이 오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이 멸망하게 될 때 그 세상에는 종말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런 시대에 자기가 세상에 있는 일을 배우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이다. 다만 먼저 자기가 깨달아야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무지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옳고 그름이란 없다고 한다. 또 모든 것은 내 탓이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항상 옳고 그름을 설명한다. 옳은 일은 옳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고, 잘못된 일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올바른 삶을 자기 속에서 만들려는 것이고, 올바른 삶을 자기 속에서 만들려고 하는 가장 큰 목적은, 현실 속에서 불행해지지 않고 자기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이다. 자기를 불행에서 건지기 위해서, 불행 속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 시대의 종교이다. 종교가 인간을 더욱 무지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종교를 갖고 있다는 이 나라에서, 그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법 속에 있는 일은 바뀌지 않는다. 있는 일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있는 일이 부딪치지 않으면 어떤 현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마음과 행위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의식 속에도 아무런 변화가 오지 않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었던 말과 자기의 행동이 나타남으로 해서 업이 생기고 공덕이 지어지는 것이지 가만히 있는데 무엇이 생겨나는 일은 없다. 항상 있는 일을 확인하고, 행해야 한다.
잘못된 사람은 좋은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좋은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평범한 현실 속에서 보게 되는 평범한 진리이다.
좋은 가르침은 우리 정신의 양식이다. 바로 삶의 양식을 말한다. 좋은 가르침을 삶의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도(正道)란, 있는 일을 밝히고,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일을 바르게 알게 해서, 자신이나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하는 올바른 길이며, 바로 이것이 정도가 지향하는 목적이며 정도가 존재해야 하는 주목적인 것이다.
사도(邪道)란 거짓말이나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을 망치게 하고, 그 사회를 망치게 하는 일을 말한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죽고 나면 4가지의 세계를 가게 된다.
이것은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설정된 차원과 다른 곳에서 설정해 놓은 차원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서 그것을 설정했느냐에 따라 다른 것뿐이다.
1차원이라는 것은, 깨달음이 없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윤회가 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애착이나 한에 묶이고 연결되어서 윤회가 되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남게 된다. 이런 영혼들은 산 사람의 몸에 붙던가 그렇지 않으면 많은 고통 속에서 지옥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처음에 죽을 때는 매우 편안하다. 그러나 죽고 나서 얼마 후, 몸이 땅에 묻히고 나면 그때부터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애착과 자기가 쌓아놓은 물질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어떤 권위적인 일들을 잊지 못해서 세상 속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이 있게 된다.
2차원이라는 것은 죽음과 동시에 자기의 모든 의식이 사라짐으로 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환생이라고 한다.
3차원이라는 것은 아주 고요한 꿈을 꾸는 상태와 같은 매우 평화스러운 상태에서 몇백 년을 머물 수 있다. 이것을 영생의 세계라 한다.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런 고통과 애착이 없는 상태에 머물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부도 하고, 또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세계이다.
4차원이란 깨달음과 열반상태. 애착과 한이 없는 깨끗한 마음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혜가 아주 뛰어난 신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옥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인지?
세상에서 거짓말이나 하면서 산 사람, 방탕한 생활이나 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서 남에게 큰 피해를 입히던 사람들은 죽으면 지옥으로 간다.
범죄자나 거짓말쟁이들은 의지가 허약한 자들이다. 의지가 허약할 때 사고를 많이 내게 된다. 이 의지가 허약한 사람들은 죽으면 하나의 환상에 붙잡혀 있게 된다.
이 환상 속에서 온갖 뱀이 자기를 항상 감고 있다거나 뱀의 소굴에 빠져 있다거나 불구덩이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보게 된다.
이러한 환상의 지옥 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옥이라는 것은 애착에 빠져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옥계를 거친 영혼들은 대부분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일이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환생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성인은 누구도 자신의 사후에 사람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지한 사람들이
성인의 이름을 팔아서
종교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성인에 대한 모독이다.'
대담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들은 귀신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
귀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일 시 : 1998년 12월 13일
장 소 : 국제정신문화연구원
대담자 : 원장 이 삼 한
김기환. 최현보. 정회심